골프를 칠 때 드라이버가 마음먹은 대로 안 맞는 날엔 즐거운 라운딩을 기대하기 어렵다. 친구들이 담소를 나누며 필드를 걸어갈 때 홀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공을 찾아 헤매야 한다. 그런데 희한한 것이 ‘연습을 더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드라이버를 바꿔야겠다’는 마음이 굴뚝같아진다.

1980년대까지도 드라이버는 나무를 깎아 만들었다. 공을 때리는 헤드의 크기는 어린아이 주먹만한 사이즈. 어지간한 실력이 아니면 페어웨이로 공을 보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잘 안 맞는 드라이버 때문에 골치 아프기로는 골프장비업체도 마찬가지였다. 매출 확대를 위해서는 골프 인구가 늘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업체들은 테니스의 킹사이즈 라켓에서 마침내 답을 찾아냈다. 그리고 헤드의 크기를 대폭 늘린 완제품을 출시하기 전에 시장조사를 실시했다. 프로 선수들을 대상으로 사용 소감을 물었더니 “이런 이상한 드라이버를 왜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늘 그러하듯이 시장조사란 곧 소비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는 노력이다. 업체들은 빅사이즈 드라이버는 시장이 원하는 제품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다만 체계적인 시장조사를 하지 못했던 한 업체만이 티타늄으로 만든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빅버사’라는 드라이버를 출시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명중률과 사거리가 탁월했던 독일군의 대포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캘러웨이의 ‘빅버사’ 드라이버는 그야말로 대포처럼 시장을 강타했고, 소규모 후발업체였던 캘러웨이는 일약 메이저 업체로 뛰어오르게 되었다.

시장의 판도를 바꿔버린 혁신 제품에 대해 프로골퍼들이 박한 평가를 내린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에게는 기존 드라이버가 더 좋은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동물적인 감각을 가진 프로선수들은 기존 감나무 드라이버를 사용하는 데 불편함이 없었다.

시장조사는 한계가 분명한 접근방식이다. 소비자들은 제품에서 어떠한 부분이 개선되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말을 한다. 그러나 이 제품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는지, 얼마나 획기적인 제품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말을 해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시장조사의 유혹을 뿌리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기업들은 설문조사, 포커스 그룹과 같은 다양한 시장조사의 유혹에 기꺼이 넘어가버린다. 그 결과는 대부분 기존 제품이나 서비스를 조금씩 수정하는 시도로 나타난다. 하지만 수정과 혁신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시장을 대폭적으로 확대하기를 원하는 경영자일수록 때로는 시장조사 결과와 다른 판단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인텔이 중앙처리장치(CPU) 업그레이드 과정에서 의견을 들은 대상은 전문 개발자들이었다. 제품을 극한적인 상황까지 몰아붙이는, 그래서 제품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전문 개발자들이 가장 정확한 피드백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견이란 게 대게 이랬다. “초당 1억번밖에 계산이 안 되나요?” “소수점 이하 30자리까지 내려가니 속도가 느려지는 현상이 발생하네요.” 이게 무슨 말인지 감이 잘 안 오는 분들을 위해 자동차로 비유하자면 “속도가 시속 250㎞를 넘어가니 핸들이 떨리네요” 같은 것들이다.

인텔은 시장조사 결과를 참고하면서도 독자적인 시각으로 시장을 읽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시 대다수 컴퓨터 유저들은 기본적인 기능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굳이 비싼 비용을 더 지불하면서 쓰지도 않을 고사양 제품을 사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텔은 펜티엄의 성능을 지속적으로 높여가되 다른 한편으로는 저사양의 셀러론을 시장에 출시, 경쟁사에 빼앗길 뻔했던 다수의 소비자를 고객으로 끌어올 수 있었다.

시장조사를 통해 얻은 데이터를 무시하라는 게 아니다. 기업은 객관적인 자료를 엄밀히 분석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자료들로부터 곧장 어떤 구체적인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시장조사를 통해 얻은 데이터에는 객관적인 정보도 담겨 있다. 하지만 이는 시장조사에 참여한 고객이 주는 절반의 메시지에 불과하다. 나머지 절반은 고객 서베이에 초대받지 못한 비고객 안에 숨겨져 있다. 그것을 찾아내고 키워나가는 능력은 스스로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독자적으로 결단을 내리는 과정에서만 얻어질 수 있다. 그때 비로소 획기적인 혁신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이우창 <세계경영연구원(IGM)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