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개혁론은 대주주와 소액주주가 같다는 명제를 전제로 하고 있다. 소위 1주1표의 주주평등주의다. 우리 상법 역시 그렇게 선언하고 있다. 소액주주운동도 그런 주장이다. 교과서도 그렇게 가르친다. 과연 그럴까. 정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1주1표의 동등한 권리는 배당을 청구하거나 재산배분을 요구하는 주주의 권리행사에 한해서 그럴 뿐이다. 세계 어느 나라도 대주주를 소액주주와 동등하게 보지 않는다. 의결권 확장(CEM·control extention mechanism) 방식은 다양하다. 차등의결권이 없는 나라도 별로 없다.

차등의결권(dual voting)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는 일본과 한국 등 극소수다. 소액주주에게조차 주식을 장기보유하면 의결권을 한두 개라도 얹어준다. 대주주 우대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이해관계의 질(質)부터가 다르다. 대주주가 주식을 매매할 때는 경영권 프리미엄을 지불한다. 소액주주는 권리의 행사자일 뿐이다. 경영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팔고 떠나면 그만이다.

그러나 대주주는 회사를 떠날 수 없다. 소유 경영자라면 더욱 그렇다. 아니 그런 주주가 대주주다. 국민연금이나 헤지펀드가 주식을 많이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대주주라는 지위를 주지는 않는다. 기껏해야 포트폴리오 투자자다. 소액주주가 주총에 참여해 표결하는 것은 이중 표결이다. 주식 매매 그 자체가 투표다. 주식의 매수는 수락이며 동의다. 매도는 거부요 기각이다. 회사에 대해 갖는 이해 구조도 다르다. 이는 주주와 근로자가 회사에 대해 갖는 이해관계가 다른 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소액주주는 근로자보다 이해관계의 심도와 수준, 그리고 시간선호가 다르다.

한국에서는 대주주가 오히려 차별받는다. 세법은 대주주 주식 매각에 대해 별도의 양도소득세를 내도록 요구하고 있다. 대주주는 ‘기업의 가치’에 주목하고 소액주주는 ‘주식의 가격’에 주목한다는 것도 차이점이다. 절대로 같을 수가 없다. 요즘은 파생상품이 성행하면서 주가가 떨어질 때 돈을 버는 거래조차 생겨났다. 이런 것을 공투표(empty voting)라고 부른다. 이것을 같다고 우기면서 대주주 의결권에 딴죽을 걸어보자는 것이 재벌 지배구조개혁론의 골자다. 대주주는 주식의 원초적 취득자이지만 소액주주는 시장취득자다. M&A 경우조차 취득 경로에 따라 별도 가격이 형성된다. 소액주주는 대주주를 선택한다. 그러나 대주주는 그럴 수 없다.

대주주는 기본적으로 창업자다. 소액주주는 대주주에게 의제자본(결코 진성자본이 아니다)을 공급하고 경영 성과에 편승한다. 의제자본이라는 단어만큼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 본질을 정확히 말한 것이다. 노름으로 따지면 전문가에게 편승해서 따라걸기하는 사람이 소액주주다. 기업의 성과는 대주주(특히 소유 경영자)의 창의성에서 나오는 것이지 소액주주의 대중행동에서 나오지 않는다. 소액주주는 단기성과에 목을 맨다. 장기성과를 추구하는 대주주와는 시간선호가 전혀 다르다.

가공자본이나 순환출자에는 의결권을 확장하는 기능이 있다. 그러나 가공자본 금지는 기업의 투자를 금지하는 것과 완벽하게 동일한 결과를 초래한다. 그리고 모든 자회사는 가공자본이다. 재벌 지배구조를 비판하는 안철수 원장이 지배하는 안철수연구소(안랩)의 자회사들도 알고보면 전부 가공자본이다. 새누리당의 경제민주화모임을 이끌고 있는 남경필 의원의 경인일보 역시 4개 자회사가 모두 가공자본이다. 그 사례들도 한번 조사를 해보자. 가공자본을 금지하면 투자는 전적으로 돈 많은 개인에게만 의존하게 된다. 기업 출자는 금지된다. 재앙이 오고 있는 것이다.

진정 재벌개혁을 원한다면 상속세를 철폐하고 배당을 높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펴다가는 미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맞아죽을 수도 있다. 더 과격한 주장이 존재한다고 해서 덜 과격한 주장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민주당을 따라잡으려는 새누리의 경제민주화 법안들이 그렇다. 재벌개혁에 대해서만큼은 정치권 전부가 광기와 무지와 흑백논리에 사로잡혀 있다. 장차 역사를 회고할 때쯤 되면 지금의 법안들은 바보들의 기념비처럼 비웃음 받을 것이다.

정규재 논설실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