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한국판 '오디세이아'를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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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60여년은 민족 비상의 시기
근대화 과정 시행착오 비난보다는 불굴의 투지가 승리한 역사를 봐야
박효종 < 서울대 교수·정치학 >
근대화 과정 시행착오 비난보다는 불굴의 투지가 승리한 역사를 봐야
박효종 < 서울대 교수·정치학 >
귀뚜라미가 울면 가을이 생각나듯 8월이 되면 단연 8·15가 생각난다. 일제의 사악한 사슬을 끊고 자유를 되찾은 날, 또 3년 후 자유민주공화국으로서의 첫걸음을 떼어놓은 날이 이날이 아닌가. 이 두 가지 쾌거가 의미있는 것은 그로부터 전개돼온 대한민국의 역사가 그리스의 고전 《오디세이아》를 빼닮은 민족적 서사시이기 때문이다. 오디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의 영웅 오디세우스가 고향인 이타케로 귀환하면서 직면하게 되는 수많은 시련과 풍상을 극복한 이야기다.
대한민국의 광복과 건국은 당시로서는 ‘보잘 것 없는 나비의 날갯짓’에 불과했다. 그 누가 작은 변방국가의 독립에 눈길이나 주었겠는가. 우리는 올림픽 금메달을 따기 전 서러움만 곱씹고 있던 무명선수와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우리는 금메달을 땄고 축복의 단비가 대한민국 전역을 촉촉하게 적셨다. 오디세우스가 귀향하면서 20년간의 항해 중 겪은 개인적 모험에 관한 이야기가 오디세이아였다면, 광복과 건국 60여년간의 여정은 민족전체가 레드 오션을 항해하면서 마주했던 운명적 시련과 난관을 이겨낸 이야기다.
우리는 과연 한국판 오디세이아를 제대로 평가하고 그로부터 소중한 교훈을 얻고 있는 것인가. 광복과 건국 세대가 흘렸던 피와 땀, 눈물도 잊지 않고 있는가. 하기야 오디세이아가 유명해진 것도 방랑시인 호메로스가 그리스 전국을 누비면서 그 서사시를 읊고 다녔기 때문일 터. 그런데 대한민국 60년간의 오디세이아를 읊고 있는 호메로스는 어디서 찾아볼 수 있는가.
20세기 초반이 패배와 통한의 역사였다면, 20세기 후반은 민족사적으로나 문명사적으로 경탄할 만한 성취의 역사다. 망국과 건국 및 부국, 그 모든 게 극적으로 어우러져 있는 것이 대한민국 역사인 만큼 교훈으로 곱씹을 만한 영양소들이 야채에 들어있는 미네랄처럼 풍부하다. 하지만 우리사회에는 이 오디세이아를 감동적으로 읊고 있는 시인들이 없다. 오히려 나라가 망한 탓을 이완용을 비롯한 일부 매국노의 탐욕으로 돌리고 다른 부분에서는 문제가 없었던 것처럼 치부하는 시각마저 유행한다. 8·15 건국의 주역인 이승만, 근대화 과업을 성공시켜 건국을 지속가능한 민족적 가치로 만든 박정희에 대해서는 독재자에 불과하다고 폄훼하기도 한다. 망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친일파 소수의 탓으로 돌리며 그들을 단죄하는 데 여념이 없고, 흥국의 역사에서는 그 주역의 흠결만 부각시키는 것이 올바른 태도일까.
하늘 높이 솟아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는 독수리를 보라. 우리에게도 이처럼 높은 데서 역사적 진실을 폭넓게 바라보는 눈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무거운 바위를 사력을 다해 산 정상에 올려놓은 것처럼 사투 끝에 일구어낸 ‘시지포스’와 같은 과업이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전혀 맛보지 못했던 상황에서 민족역사상 처음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작동시켰던 것이다. 더욱이 이것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공산주의의 위협 아래서 자유민주주의 그 자체를 지켜내야 하는 투혼의 문제이기도 했다. 또 가난에 찌든 나라에서 ‘초근목피(草根木皮)’ 상황을 탈출해야 하는 일도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백성’은 있었으나 공동체 의식으로 뭉친 ‘국민’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국민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과업도 절박했다.
한국 현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가장 근본적이며 치명적인 결함은 독재와 권력의지, 인권침해만을 문제 삼느라 분단과 전쟁, 치열한 남북대치, 절대빈곤과의 대결상황을 용기있게 헤쳐 나간 오디세이아가 우리의 역사임을 인정하는 데 인색한 것이다. 8·15에 대한 진정한 성찰은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미처 챙기지 못한 일들을 마무리하며, 그 과정에서 생겨난 모순과 부조리를 치유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데 있는 것이지, 이승만·박정희 시대를 정당성이 없는 시대로 낙인찍음으로써 허무주의로 치닫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8·15의 의미를 성찰한 후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나라라고 단정해오던 구태의 시각이 불굴의 투지가 승리한 역사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바뀌어질 수 있다면, 8·15 정신은 우리의 앞길을 견인하는 든든한 향도가 될 수 있으리라.
박효종 < 서울대 교수·정치학 >
대한민국의 광복과 건국은 당시로서는 ‘보잘 것 없는 나비의 날갯짓’에 불과했다. 그 누가 작은 변방국가의 독립에 눈길이나 주었겠는가. 우리는 올림픽 금메달을 따기 전 서러움만 곱씹고 있던 무명선수와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우리는 금메달을 땄고 축복의 단비가 대한민국 전역을 촉촉하게 적셨다. 오디세우스가 귀향하면서 20년간의 항해 중 겪은 개인적 모험에 관한 이야기가 오디세이아였다면, 광복과 건국 60여년간의 여정은 민족전체가 레드 오션을 항해하면서 마주했던 운명적 시련과 난관을 이겨낸 이야기다.
우리는 과연 한국판 오디세이아를 제대로 평가하고 그로부터 소중한 교훈을 얻고 있는 것인가. 광복과 건국 세대가 흘렸던 피와 땀, 눈물도 잊지 않고 있는가. 하기야 오디세이아가 유명해진 것도 방랑시인 호메로스가 그리스 전국을 누비면서 그 서사시를 읊고 다녔기 때문일 터. 그런데 대한민국 60년간의 오디세이아를 읊고 있는 호메로스는 어디서 찾아볼 수 있는가.
20세기 초반이 패배와 통한의 역사였다면, 20세기 후반은 민족사적으로나 문명사적으로 경탄할 만한 성취의 역사다. 망국과 건국 및 부국, 그 모든 게 극적으로 어우러져 있는 것이 대한민국 역사인 만큼 교훈으로 곱씹을 만한 영양소들이 야채에 들어있는 미네랄처럼 풍부하다. 하지만 우리사회에는 이 오디세이아를 감동적으로 읊고 있는 시인들이 없다. 오히려 나라가 망한 탓을 이완용을 비롯한 일부 매국노의 탐욕으로 돌리고 다른 부분에서는 문제가 없었던 것처럼 치부하는 시각마저 유행한다. 8·15 건국의 주역인 이승만, 근대화 과업을 성공시켜 건국을 지속가능한 민족적 가치로 만든 박정희에 대해서는 독재자에 불과하다고 폄훼하기도 한다. 망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친일파 소수의 탓으로 돌리며 그들을 단죄하는 데 여념이 없고, 흥국의 역사에서는 그 주역의 흠결만 부각시키는 것이 올바른 태도일까.
하늘 높이 솟아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는 독수리를 보라. 우리에게도 이처럼 높은 데서 역사적 진실을 폭넓게 바라보는 눈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무거운 바위를 사력을 다해 산 정상에 올려놓은 것처럼 사투 끝에 일구어낸 ‘시지포스’와 같은 과업이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전혀 맛보지 못했던 상황에서 민족역사상 처음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작동시켰던 것이다. 더욱이 이것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공산주의의 위협 아래서 자유민주주의 그 자체를 지켜내야 하는 투혼의 문제이기도 했다. 또 가난에 찌든 나라에서 ‘초근목피(草根木皮)’ 상황을 탈출해야 하는 일도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백성’은 있었으나 공동체 의식으로 뭉친 ‘국민’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국민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과업도 절박했다.
한국 현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가장 근본적이며 치명적인 결함은 독재와 권력의지, 인권침해만을 문제 삼느라 분단과 전쟁, 치열한 남북대치, 절대빈곤과의 대결상황을 용기있게 헤쳐 나간 오디세이아가 우리의 역사임을 인정하는 데 인색한 것이다. 8·15에 대한 진정한 성찰은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미처 챙기지 못한 일들을 마무리하며, 그 과정에서 생겨난 모순과 부조리를 치유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데 있는 것이지, 이승만·박정희 시대를 정당성이 없는 시대로 낙인찍음으로써 허무주의로 치닫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8·15의 의미를 성찰한 후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나라라고 단정해오던 구태의 시각이 불굴의 투지가 승리한 역사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바뀌어질 수 있다면, 8·15 정신은 우리의 앞길을 견인하는 든든한 향도가 될 수 있으리라.
박효종 < 서울대 교수·정치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