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시즌이 도래했다. 새 국가지도자의 자질과 조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2013년은 1997년의 외환위기 이후 가장 힘든 한 해가 될 것이다. 경제위기 극복, 사회 갈등 해소, 남북관계 개선 등 뛰어난 리더십과 돌파력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결국 누가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비전을 제시하는가, 국민의 바람과 아픔을 보듬는 통합과 섬김의 자세를 보여주는가에 국민의 선택이 결정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국가 지도자로 평가받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리더십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왜 도쿠가와인가? 도쿠가와는 16세기 일본 전국시대의 혼란을 극복하고 천하를 통일한 인간승리의 한 전형이다. 그는 그 과정에서 안정적·균형적·합리적 리더십의 유형을 제시했다. 260여년간 이어진 도쿠가와 막부 번영의 초석을 닦았고 경제부흥, 문화·교육 창달 등 평화시대를 열었다. 사무라이 정신, 사농공상(士農工商) 체계 등 소위 ‘일본식 시스템’을 확립한 당사자다.

훌륭한 지도자는 개인적 시련을 통해 단련된다. 그는 아버지가 암살 당하고 본인도 12년간의 인질생활과 정략결혼을 강요 당했으며 자신의 장남과 처를 할복시켜야 했던 엄청난 고통의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 인고(忍苦)의 과정에서 인간과 정치를 이해하고 전국시대의 지도자로서는 드물게 관용과 화합의 통치를 행했다. 그의 뛰어난 절제력과 인내심은 개인적 시련의 극복을 넘어서 도쿠가와 집단의 단결과 정권의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곳을 가는 것과 같다. 인내는 무사장구(無事長久)의 근원이요, 분노는 적이라 생각하라.” 그가 남긴 명언이다.

다음으로 도쿠가와는 시대가 필요로 하는 실용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전국시대를 무력으로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리한 조선침략으로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지방의 재정난이 한계에 달하자, 히데요시 사후 신속한 철병과 민심수습에 나선 것은 그가 백성을 생각하는 절제와 포용의 정치인임을 입증해 준다. 세키가하라 전투 승리로 정권을 장악하자 무인(武人) 세력을 배척하고 새로운 국가건설에 필요한 학자, 신진관료, 상공인, 재정전문가 등을 과감히 발탁해 민생에 최우선순위를 두겠다는 그의 비전을 실천했다. 오쿠보 나가야스 같은 금광개발자를 중용하고 전국의 광구를 적극 개발해 엄청난 세입 창출을 도모한 것도 그의 실용주의적 정책 마인드를 잘 보여준다. 이에 따라 막대한 재정흑자를 다음 대인 히데타다와 이에미쓰에게 물려줌으로써 안정된 국가운영과 건전한 사회기풍을 확립했고 경제활동의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유도했다.

또한 도쿠가와는 통합과 포용의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했다. “꽃과 열매를 같이 주지 않는다”는 통치철학에 따라 친인척과 가신(家臣)에게는 영토는 적게 준 반면 커다란 정치적 발언권을 주었다. 반면에 반대편에 섰던 구 히데요시 세력은 영토는 많이 주었지만 정치참여는 배제하는 분할통치를 분명히 했다. 본인은 정책을 수립하고, 후계자인 히데타다는 실무적 집행을 담당케 함으로써 의사결정 과정에서 머리와 몸통을 구분하고 히데타다의 과욕과 미숙을 적절히 견제했다. 그가 남긴 ‘정치는 납득이다’ ‘상대의 인간적인 약점만 찾아다니면서 대책을 세운다면 그건 정치가 아니라 추악이다’는 어록에서는 그가 정치의 본질을 꿰뚫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말처럼 뛰어난 국가 지도자가 되려면 먼저 뛰어난 정치인이 돼야 한다.

도쿠가와는 자신의 후계자는 태평성세를 이끌어 갈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에서 신중한 히데타다를 2대 쇼군으로 발탁했다. 이는 결국 히데타다-이에미쓰쓰나요시로 이어지는 황금시대를 가져왔다. 또한 일국일성령(一國一城令)을 제정해 지방의 무력 확충을 억제한 점, 참근교대제(參勤交代制)를 통해 지방영주를 일정 기간 에도에 강제 거주토록 해 쿠테타 가능성을 차단한 점, 황실과 무인집단을 통제하는 제도를 마련한 점 등도 막부체제 유지에 크게 기여했다. 도쿠가와의 리더십은 결국 지도자의 비전과 절제, 포용의 자세가 성공적인 국가 경영의 필수 덕목임을 잘 보여준다.

박종구 < 한국폴리텍대 이사장 pjk@kopo.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