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이 아무리 불확실한 환경에서 투자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방향은 가늠이 돼야 투자 결정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치적으로 그럴싸하게 보이는 슬로건만 보고 부지를 사고 공장을 짓고 인력을 고용하는 등 10년, 20년은 내다보아야 할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 투자결정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이래서 선거 전후 1년 동안은 투자가 위축되는 정치적 경기변동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일자리가 중요한 국민들도 불안해지기는 마찬가지다.
주장하는 경제정책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런 정책들이 미칠 파장이 어떨지 잘 모르는 정치인들일수록 경제정책을 무슨 정치적 슬로건인 양 쉽게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어렵게 얘기할수록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기 때문에 쉽게 감성적으로 접근하는지도 모른다. 이른바 경제의 정치화 현상이다.
국가경제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중요한 정책임에도 대개는 토론도 공론도 거치지 않고 몇몇 주변 참모들에 의해 결정된 슬로건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미디어를 통해 빠르게 확산되고 정치쟁점화된다. 물론 실질적인 토론은 사라지고 찬반양론 대립만 무성한 결과를 가져온다. 마침내 집권이라도 하면 변경돼서는 안 되는 성역의 도그마로 변해 경제에 무거운 짐이 된다.
예를 들면 노태우 정부 시절에는 모든 정책이 민주화로 통했다. 이른바 87년 체제 이후 강성화된 노동운동에 힘입어 급등한 임금은 때마침 불어닥친 자산가격 버블과 맞물려 한국경제의 고비용저효율 구조를 초래해 후일 경제위기의 싹을 키웠다. 김영삼 정부 들어서는 신경제5개년계획, 해외순방 중 느닷없이 발표된 세계화정책 등으로 엄청난 혼란이 초래됐다. 세계화가 이미 추진하고 있던 국제화와는 무엇이 다른지부터가 혼란스러웠고 마침내 한국경제의 부담능력을 넘어선 급속한 개방으로 경제위기를 초래했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위기극복 과정에서 추진됐던 재벌개혁 등 과도한 개혁과 구조조정으로 성장잠재력이 반토막난 가운데 이른바 퍼주기식 대북지원으로 남남분열이 비등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재벌과 비재벌, 강남과 비강남, 수도권과 비수도권 등의 편가르기 속에서 추진된 국토균형발전 정책은 20여개 신도시 건설 등 전국을 토건사업장화해 엄청난 토지보상금, 전국적인 지가상승 등 많은 후유증을 초래했다. 초기에 성장률 회복과 일자리 창출 등 친기업정책을 기치로 출범했던 이명박 정부는 지방선거와 총선을 거치면서 친서민정책으로 방향을 선회했는데 오히려 가계부채 급증, 부동산경기 장기침체 등 서민들의 주름살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
이처럼 경제의 정치화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좌충우돌 바뀌는 경제정책 환경 속에서 기업투자가 활성화돼 성장률이 늘고 일자리가 창출되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정권별 성장률 추이를 보면 전두환 정부 10.0%, 노태우 정부 8.7% 김영삼 정부 7.4%, 김대중 정부 5.0%, 노무현 정부 4.3%, 이명박 정부 3.1%로 계속 하락 추세다.
요즘 다시 선거철이 되면서 여야 가릴 것 없이 개념도 불확실하고 내용도 분명치 않은 정치적 슬로건들이 마치 거부할 수 없는 성역인 것처럼 등장하고 있다.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진 성장률이 다음 정권에서는 얼마나 더 떨어지고 서민들의 일자리가 얼마나 더 날아가야 정치권은 정신을 차릴 것인가. 경제정책이란 전문가들이 정교한 모형으로 연구하고 심도 있는 논의를 거쳐 대책을 마련해도 쉽지 않은 분야다. 제발 경제의 정치화를 그만두라.
오정근 < 고려대 교수·경제학 / 아시아금융학회장 ojunggun@korea.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