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부는 ‘2012년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을 공표했다. 하반기 경제정책 기조를 ‘경제활력 제고’와 ‘서민생활 안정’에 둔다는 것이 그 골자다. 유럽 재정위기의 장기화가 확실시되는 가운데 정부는 올해 성장률 예상치도 3.3%로 하향 조정했다. 정부의 이번 전망과 정책대응은 큰 틀에서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세부적으로는 재고해야 할 부분들이 눈에 띈다. 그중 하나가 ‘한국은행과 협조해 저신용·저소득층에 대한 은행권 금융지원을 확대한다’는 정부의 구상이다.

서민금융을 활성화하고 가계부담을 덜어주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 언론은 한은이 돈 찍어 가계부채를 구제한다는 발상에 비판적이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한은의 독립성 측면에서 타당하며 국민경제적 관점에서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잠시 눈을 돌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주요국의 통화정책과 금융감독의 변화부터 먼저 생각해보자.

지난 수년간 미국 중앙은행(Fed)등 주요국 중앙은행은 위기 수습과 경기 회복을 위해 정책금리를 매우 낮은 수준으로 유지했다. 이런 가운데 금융기관과 시장에 대한 긴급유동성 공급, 양적완화, 국채의 평균만기연장 등 비표준적 통화정책을 구사해왔다.

한편 금융감독에서 주요국은 금융시스템 전반의 건전성에 초점을 맞춘 거시건전성 감독접근을 도입했다. 이는 개별 금융기관의 미시건전성을 보는 기존 감독과는 구분되는 접근이다. 특히 통화당국인 중앙은행은 평소 거시경제 및 금융시장에 대한 전문성과 감각을 지녔다는 점에서 거시건전성 감독에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결국 글로벌 위기 이후 전개된 통화정책 및 금융감독의 급속한 진화과정에서 중앙은행은 물가안정 외에 금융안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거시정책기관으로 우뚝 서게 됐다. 이러한 상황 전개는 한은에 물가안정·금융안정 책무를 통해 국민경제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기회는 자칫 ‘위기’로 바뀔 수 있다. 금융안정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한은이 정치적 압력에 노출되면 금융안정도 물가안정도 둘 다 위태로울 수 있다는 뜻이다. 왜 그런가?

민주국가의 국민은 주기적으로 선거를 통해 정부(행정부)를 선택한다.

따라서 정부는 차기 선거 이전에 가시적 경제성과를 통해 국민의 지지를 확보해야 한다. 소득과 성장을 끌어올리는 단기적 경기부양에 정부가 늘 집착하는 이유다. 한편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은 중장기 과제이다. 물가안정을 위해서는 통화정책의 중장기적 일관성이 중요하다. 금융은 대차계약에 따른 시간 경과를 수반하므로 금융안정도 중장기적 현상이다.

선거를 앞둔 정부는 물가안정 및 금융안정과 같은 중장기 과제를 희생해서라도 단기 경기부양에 몰입하는 경향이 강하다. 단기 시계에 집착한다고 해서 물가안정이나 금융안정이 즉시 깨지거나 위기가 당장 닥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정부의 잘못된 유인을 감안한 대응책이 바로 중앙은행의 독립성이다. 국민경제의 지속가능한 성장과 중장기적 안정을 도모하려는 현명한 정부는 처음부터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의 법률적 양대 책무를 중장기 시계를 가진 중앙은행에 부과한 후 운영상의 독립성을 보장한다. 이에 따라 중앙은행은 정부와 적정 거리를 두고 중장기적 정책일관성을 통해 양대 책무를 도모하게 된다.

현실에서 한은은 물가안정 책무보다는 금융안정 책무의 수행에서 독립성을 위협받기 쉽다. 한은이 정책금리를 조정하면 그 효과가 금융시장을 통해 단기금리에서 장기금리로, 그리고 실물투자로 파급된다. 이런 의미에서 통화정책의 효과는 거시적·일반적·간접적이다.

반면 금융안정을 위한 정책조치는 특정 금융기관, 시장, 계층을 겨냥하는 일이 잦다. 그런 조치의 효과는 미시적·선별적·직접적이다. 여기서 정책조치 대상의 선택에는 궁극적으로 정치적 판단이 요구된다. 이렇게 본다면 거시건전성 감독업무에서 한은은 감독당국과의 적절한 분업을 통해 거시정책기관의 영역을 넘어서는 결정은 삼가는 것이 원칙이다.

한은은 금융안정을 위해 시스템 전반의 리스크를 정기적으로 점검·평가하고 금융사이클의 현재 국면에 대한 판정을 내리는 정도가 적절하다. 그 선을 넘어서는 순간 한은은 금융안정 책무에서 정치적 압력에 노출될 것이고, 급기야 통화정책의 독립성마저 위협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이번 서민자금지원프로그램이 한은의 기존 중소기업자금지원프로그램(총액한도대출)과 다를 바 없다고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총액한도대출을 바람직한 참고사례로 보기는 어렵다. 이 제도는 과거 개발금융시대에 번성했던 정책금융을 1990년대 중반 대폭 정리하면서 임시로 남겨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은행 60년사’에는 정부의 ‘생계형 금융채무 불이행자에 대한 신용회복지원 방안’에 따라 한은이 2006년 2월 산업은행을 통해 자산관리공사에 4462억원을 대출한 전례가 나온다. 문제는 이런 비영리기업에 대한 한은 지원의 법률적 근거가 대개 불명확하다는 점이다.

서민복지정책에 금융의 옷을 입혀 성공한 사례는 거의 없다. 맨인베스트먼트자산운용 자회사인 GLG파트너스의 벤 퍼넬 펀드매니저는 영세민의 주택보급 확대라는 사회복지정책을 위해 저리 대출로 서민을 부추긴 결과가 바로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라고 파이낸셜타임스 칼럼을 통해 지적한 바 있다.

이번 지원프로그램이 정부가 ‘복지’ 차원에서 서민층의 빚을 경감시켜 주겠다는 의도라면 금융을 동원하지 말고 정부 재정으로 집행하는 것이 옳다. 서민층 채무조정과 금융안정 차원에서 저리자금을 지원하겠다는 취지라면 기존의 각종 신용회복·서민우대금융 프로그램이 가뜩이나 모럴해저드를 자극하는 상황에서 또 다른 지원프로그램을 추가해야 하는 이유부터 제시해야 할 것이다.

연말 대선을 앞두고 ‘빚 갚으면 바보’가 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부쩍 팽배해지고 있다. 이제라도 한은은 자신의 독립성과 책임성, 평판과 신뢰를 스스로 지켜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단기 시계를 가진 정부를 견제하고 국민경제의 건전한 성장과 안정에 한은이 중장기적으로 기여하는 유일한 길이다.

김홍범 < 경상대 교수 >

△서울대 경제학과 △뉴욕주립대 경제학 박사 △금융발전심의위원 △한국경제학회 부회장 △현 한국사회과학협의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