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이 뚫린 쟁반, 거미모양 레몬즙짜개, 새소리가 나는 주전자…. 이탈리아 주방용품업체 알레시가 만든 제품들이다. 처음 본 사람들은 ‘인테리어 용품’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한 주방용품처럼 보이지 않는 특이한 디자인 때문이다. 하지만 이 회사엔 디자이너가 없다. 모두 외부에 있는 전문 디자이너에게 맡긴다.

창업자인 지오반니 알레시가 1921년 회사를 세웠을 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의 손자인 알베르토 알레시가 1970년 부친(카를로 알레시)을 도와 경영에 참여하자마자 사내 디자이너를 없앴다. 1980년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하기 10년 전이었다. 알베르토는 “세계적 디자이너들과 함께 단순한 주방용품을 뛰어넘는 ‘예술 작품’을 내놓고 싶다”고 했다. 주방용품 제조회사에서 디자인 기업으로 변신을 꾀했다. 그 결과 와인 오프너 ‘안나G’와 쟁반세트 ‘지로톤도’, 레몬즙짜개 ‘주이시살리프’가 나왔다.

작은 주방용품업체는 변신을 통해 연 매출 1억3800만유로(약 2000억원)를 올리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제품은 60여개국에서 팔린다. 프랑스 산업디자이너 필립 스탁은 “알레시는 주방용품업체가 아니다. 사람들에게 행복을 파는 디자인 기업”이라고 평가했다.

○“디자이너? 고용할 필요없다”

지금도 알레시에는 사내 디자이너가 없다. 대신 세계 유명 디자이너 200여명이 이 회사의 파트너다. 알베르토 알레시 대표는 디자이너를 고용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그들이 고용되길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직원이 되면 자유롭게 디자인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알레시 고유의 디자인도 없다. 디자이너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철학을 알레시라는 큰 그릇에 담아내는 것이 회사의 목표다. 1985년 출시한 주전자 ‘버드케틀’은 미국 건축가 마이클 그레이브스가 디자인했다. 주둥이가 볼록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매끈하게 만들었다. 물이 끓어오르면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난다. 알레시 대표는 “특정 스타일을 디자이너에게 강요한 적이 한번도 없다”며 “많은 디자이너들이 평범하지 않은 제품을 계속 만들어줘야 디자인 기업이 유지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번 인연을 맺은 디자이너의 권리는 끝까지 보장한다. 매출의 일정 비율을 디자이너에게 지급한다. 디자이너들이 맘껏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시간도 넉넉히 준다. “알레시와 일하는 디자이너들은 짧게는 1년, 길게는 7~8년을 내다보면서 준비한다”는 게 회사의 설명이다.

세계적 산업디자이너 스테파노 지오반노니도 이런 알레시의 노력을 높이 샀다. 지오반노니는 10년 전 숟가락과 포크를 디자인했다. 손잡이 속이 비어있어 가볍고 쥐기 편했다. 하지만 이 아이디어를 구현하면서 제작 단가를 맞추는 일이 쉽지 않았다. 알레시는 시간에 연연하지 않았다. 전 세계를 돌며 납품할 수 있는 업체를 찾아냈다. 출시까지 4년이 걸렸다. 지오반노니가 디자인한 숟가락·포크 세트는 알레시의 대표 상품이 됐다.

○새로운 시장을 만들다

‘주방용품에 예술을 담자.’ 알레시의 철학이자, 시장전략이다. 기존 주방용품과 차별화해 시장을 확대할 수 있다고 봤다. 전략은 주효했다. 작은 크기로 줄인 알레시의 이쑤시개통은 쓰기는 불편했지만 보기에 좋았다. 찾는 사람이 많았다. “알레시 제품은 상대적으로 싼 가격에 소장할 수 있는 예술품이 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마니아들도 생겼다. 이들은 전시용으로 알레시 제품을 산다.

경쟁자도 없다. ‘예술적 주방용품’ 시장의 개척자이자 유일한 업체가 알레시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작은 가족 기업 알레시가 세계적 업체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알레시 대표는 “이미 성공한 제품을 복제하는 전략은 실패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틈새시장을 개척하면 시장을 독점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변신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알레시 제품에는 디자이너의 서명이 새겨져 있다. 비싼 디자이너 작품을 소장한다는 느낌을 주기 위한 전략이다. 필립 스탁이 디자인한 레몬즙짜개 ‘주이시 살리프’는 소장용 제품의 대표적 사례다. 금으로 도금한 한정판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알레시는 이 제품에 대해 “실제 사용하는 것도 좋지만, 서재에 전시해도 훌륭한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알레시의 몇몇 제품은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디자이너들이 ‘시리즈’를 맡아 연속성 있는 작품을 내놓는 것도 알레시만의 특징이다. 이탈리아 디자이너 알렛산드로 멘디니는 1994년 ‘안나G’라는 이름의 와인 오프너를 만들었다. 이후 후추통, 도시락통, 주방용타이머 등 안나 시리즈가 이어졌다. 9년 뒤엔 안나의 남자친구 격인 ‘알렛산드로엠’이 등장하기도 했다. 스토리텔링 전략을 활용한 것이다.

○“실패해도 괜찮아”

알레시의 디자인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다. 알레시 대표는 “1000개의 디자인 중 상품이 돼 나오는 것은 한두 개뿐”이라고 말했다. 알레시의 대표적 실패작은 ‘갈고리가 달린 빗’이었다. 개발기간은 몇년이 걸렸다. 그리고 5만개를 생산했다. 하지만 출시를 앞두고 시장성이 없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알레시는 과감히 판매를 포기했다. 알레시 대표는 갈고리 빗을 폐기처분하지 않았다. 이를 열쇠고리로 만들어 직원들에게 나눠줬다. “실패에서 배우고, 이를 성공의 발판으로 만들자”는 취지에서다.

알레시는 신진 디자이너들과 실험적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실패하더라도 디자이너들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면서 성장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 알레시 리서치 센터에서는 젊은 디자이너들의 응모작들을 검토한다. 좋은 디자인은 직접 상품으로 만들어 시장에 내놓는다. 세계 유명 대학과 단체를 돌며 워크숍도 연다.
1998년엔 알레시 박물관을 열었다. 많이 팔린 제품은 물론 상용화되지 않은 디자인의 스케치, 도면 등도 걸어놓았다. 시험용으론 만들었지만 상품으로 출시하지 못한 ‘실패작’도 전시돼 있다. 실패를 대하는 적극적인 태도는 알레시가 성공한 또 하나의 비결이다.

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