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이 저주의 땅 ‘에덴의 동쪽’으로 추방당하는 성서의 스토리는 실락원(失樂園)의 비극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행복을 뜻하는 ‘에덴’과 떠돌이를 뜻하는 ‘노드’, 즉 에덴의 동쪽은 지금 나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모두 죄에 뿌리를 둔 카인의 후예라는데, 고통과 질곡이 넘치는 에덴의 동쪽을 벗어날 수는 없을까. ‘에덴의 회복’을 갈구하는 것, 진정한 행복을 되찾으려는 인간의 부단한 시도는 성공할 수 있을까. 도대체 행복의 조건은 무엇일까.

나는 어린 시절 고통이 없는 것이 행복인 걸로 생각했다. 조금 자라서는 ‘누구도 나를 함부로 통제할 수 없는 삶’을 추구했다. 다만 미래는 내 스스로 예측과 통제가 가능해야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돈이든 평판이든 영향력이든, 가족·직장·사회의 모든 네트워크이든 부지런히 쌓아 두라는 조언에 공감했었다. 그런데 지천명(知天命)이라고 했던가. 오십을 앞둔 지금, 치열하게 살았던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성공과 실패 그리고 반전이 있었던 나의 삶이 아주 잠깐씩 행복했고, 무수히 긴 시간 불행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마침내 알아차렸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과 내 뜻대로 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니라는 것, 미래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 바로 ‘신’의 현실이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인생 후반전을 앞두고 조금 겸허한 마음으로 행복의 조건을 다시 정의해 본다. 그 하나는 바로 이 순간을 살라는 것, 그냥 오늘 하루를 온몸으로 느끼라는 것이다. 진짜 중요한 일은 미래에 생긴다는 믿음은 이제 버려도 좋다. 바로 오늘이 내 삶의 마지막일 줄 누가 알겠는가. 두 번째는 고통이 행복을 빼앗지 못한다는 믿음이다. 나의 경우 고통이란 ‘희미해지는 훈련’이었다. 한결 가벼워진 나는 비로소 영혼의 진정한 행복을 갈망했다. 그것은 ‘자아’라는 감옥으로부터 출소하는 것, 보다 큰 자유를 선포하는 공감과 소통의 통로였다. 마지막은 뭐니뭐니 해도 ‘사랑’이 해답이다. 사랑이 이기는 것은 미움과 분노가 아니다. 그것은 절망으로 둘러싸인 두려움이다. 이것은 갇힌 자아를 벗어날수록, 다른 사람을 조금 더 깊이 의식할수록 마중물처럼 넘쳐흐른다.

나는 이제 에덴이 어디 있는지를 윤동주의 시 한 구절을 통해 마무리짓고 싶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했던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나에게도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십자가의 처절한 고통을 부러워하기까지 한 시인은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때로는 죽음이라는 극단에 이르기까지 이타적 결단을 조용히 수용하는 고귀함에 두었다. 그리고 그것이 행복이라고 했다.

이은경 < 법무법인 산지 대표변호사 eklee@sanjilaw.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