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사회에서 고전이 힘을 얻고 있다. 대학가에서는 고전 읽기를 강조하고, 출판계에서는 고전 다시 쓰기를 기획한다. 얄팍한 인스턴트 지식들을 떨쳐내고 심신을 울리는 묵직한 고전의 쇳소리를 듣고 싶은 것일 게다.

하지만 큰 결심하고 몇 권 골라 읽어도 기대한 쇳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왜 그럴까. 사람들은 말하리라. 고전은 언제나 우리의 바깥에서만 맴돌고 있다고. 그러나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1750~1805)는 반대로 말한다. 고전은 언제나 우리 안에서만 맴돌고 있다고. 그래서 고전을 알기 어렵다고. 《정유각문집(貞閣文集)》의 ‘시학론(詩學論)’을 보자.

“우리나라 시는 송(宋) 금(金) 원(元) 명(明)을 배운 사람이 상류다. 당(唐)을 배운 사람이 그 다음이다. 두보(杜甫)를 배운 사람이 최하다. 배운 내용이 더 높을수록 그 재주가 낮은 것은 어째서일까. 두보를 배운 사람은 두보가 있음만 알 뿐 나머지는 보지도 않고 업신여긴다. 그래서 작법이 더욱 졸렬하다.”

박제가는 조선후기 지성사에서 샛별 같은 사람이다. 정조 연간 청의 학문을 수용하고 선진 문물을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꽤 있었지만 박제가처럼 이를 북학(北學)이라 개념규정하고 정조에게 상소한 사람은 없었다. 홍대용도 박지원도 북학을 말하지는 않았다.

당시 북학 담론이 실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북학사상이라는 학술 용어가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박제가의 문제작 《북학의》에 힘입은 것이다. 물론 《북학의》가 특별한 것은 북학의 창발성 때문만은 아니다. 일본 메이지 시대의 문명개화론, 또는 한국 박정희 시대의 조국근대화론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이 책에는 조선의 부국(富國)을 위한 파격적인 제안들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커진다. 박제가는 조선 사회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제안을 하면서 그것을 왜 북학이라는 개념으로 표상한 것일까. 북학이란 《맹자(孟子)》‘등문공상(文公上)’에서 보듯이 초(楚)의 진량(陳良)이 평소에 주공과 공자의 도를 좋아해 북으로 중국에 유학 가서 현지 학자를 능가하는 큰 학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에 출처를 두고 있는 말이다. 이 말의 뜻은 조금 섬세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마 진량은 중국에 가기 전에 충분히 초에서도 중국을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참다운 중국, 곧 주공과 공자의 도는 초의 바깥에 있었고 그렇기에 그는 중국으로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진량이 공부한 참다운 중국은 ‘초 안의 중국’이 아니라 ‘초 밖의 중국’이었다. ‘우리 안의 중국’이 아니라 ‘우리 밖의 중국’이었다. 박제가가 자신의 작품에 북학의 제목을 부여한 것은 곧 그가 구상한 것이 ‘조선 안의 중국’을 버리고 ‘조선 밖의 중국’을 취하자는 계몽의 기획이었음을 암시한다.

사태의 심각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조선은 항상 중국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조선이 잘 알고 있는 것은 ‘중국’이 아니라 ‘조선 안의 중국’이 되었다. 바깥이 없는 사회의 슬픔이라고나 할까.

도대체 중국이 무엇이던가. ‘조선 안의 중국’은 조선에서 문화적으로 소비되는 중원과 강남일지 모르나 ‘조선 밖의 중국’은 중국의 현지 정세에서 조우하는 만주, 몽골, 티베트였다. 이를 통해 중국을 본다는 것과 중원과 강남을 통해 중국을 본다는 것은 그 감각이 서로 얼마나 다른가.

요컨대 북학은 단순히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배우자는 기술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우리 안의 중국’을 극복하고 ‘우리 밖의 중국’을 자각해 참다운 문명을 다시 수립하자는 사상적인 차원, 학문적인 차원의 문제였다.

고전을 읽어도 고전이 잘 읽히지 않는다면 박제가의 북학을 생각해 보라. 우리의 고전은 지금도 ‘우리 안의 중국’ ‘우리 안의 서양’에 갇혀 있지는 않은가.

노관범 < 한국고전번역원 전문위원 >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itkc.or.kr)의 ‘고전포럼-고전의 향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