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장각에 가면 정조의 개혁 정치가…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인문학 산책] 한국고전번역원과 떠나는 지식여행
왕권 강화 '주춧돌'
세조 때 첫 설치 제창…정조가 창덕궁에 전각 짓고 송나라 제도·관직 본격 도입
'조선 르네상스' 주도
처음에는 왕실 도서관 역할, 학술·정책 연구기관 변신…정치 개혁·문화 부흥 뒷받침
왕권 강화 '주춧돌'
세조 때 첫 설치 제창…정조가 창덕궁에 전각 짓고 송나라 제도·관직 본격 도입
'조선 르네상스' 주도
처음에는 왕실 도서관 역할, 학술·정책 연구기관 변신…정치 개혁·문화 부흥 뒷받침
선거철에만 반짝하던 공약들이 선거 이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취를 감추곤 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전문적인 학문연구기관을 창설하고 그곳에서 축적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개혁정치를 추구했던 정조의 자세는 상당히 주목할 만하다.
18세기 후반 정조시대는 우리 역사에서 왕조 중흥과 문화 중흥의 꽃이 활짝 핀 전성기이자 ‘조선의 르네상스’로 평가받는다. 정조는 열한 살에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고 힘겹게 왕위에 올라 불안한 정치적 상황에 놓여 있었지만, 왕권 강화를 추진함으로써 이를 잘 극복했다.
이것을 뒷받침한 대표적인 기관이 바로 규장각(奎章閣)이다. 정조시대에 가장 중시된 정치적·문화적 기구인 규장각. 걸출한 학자들을 양성하며 문예 부흥을 주도하고 왕권 안정을 뒷받침했던 규장각을 설치한 과정이 ‘정조실록’(정조 즉위년 9월25일)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규장각을 창덕궁 금원(禁苑) 북쪽에 세우고 제학(提學) 직제학(直提學) 직각(直閣) 대교(待敎) 등 관원을 뒀다. 국조에서 관직을 설치한 것이 모두 송나라 제도를 따랐으니 홍문관은 집현원(集賢院)을 모방했고, 예문관은 학사원(學士院)을 모방했으며, 춘추관은 국사원(國史院)을 모방했으나 유독 어제(御製)를 존각(尊閣)에 간직할 바로는 용도각(龍圖閣)이나 천장각(天章閣)과 같은 제도가 있지 않았다.”
그런데 정조 이전인 세조대에 양성지(梁誠之)에 의해 규장각 설치가 제창된 적이 있었다. 숙종대인 1694년(숙종 20)에는 종정시(宗正寺)에 작은 건물을 별도로 지어 규장각이라 쓴 현판을 걸기도 했다.
“세조조(世祖朝)에 동지중추부사 양성지가 아뢰기를 ‘군상(君上)의 어제(御製)는 운한(雲漢)과 같이 하늘에 밝게 빛나니 만세토록 신자(臣子)는 마땅히 존각(尊閣)에 소중히 간직할 바이기 때문에 송조(宋朝)에서 성제(聖製)를 으레 모두 전각을 세워서 간직하고 관직을 설시하여 관장하게 했습니다. 바라건대 신 등으로 하여금 어제 시문(詩文)을 교감해 올려서 인지각(麟趾閣) 동쪽 별실에 봉안하되 규장각이라 이름하고, 또 여러 책을 보관한 내각(內閣)은 비서각이라 이름하며, 다 각기 대제학 직제학 직각 응교 등 관원을 두되 당상관은 다른 관직이 겸대하고 낭료는 예문관 녹관(祿官)으로 겸차(兼差)해 출납을 관장하게 하소서’ 했는데 세조가 빨리 행할 만하다고 일컬으면서도 설시할 겨를이 없었다. 숙종조에는 열성의 어제(御製)·어서(御書)를 봉안하기 위해 별도로 종정시에 소각(小閣)을 세우고 어서한 ‘규장각’ 세 글자를 게시했는데, 규제(規制)는 갖추어지지 않았었다.”
규장각은 정조가 ‘계지술사(繼志述事· 선왕의 뜻을 계승하여 정사를 편다)’의 명분 아래 재탄생시켰다. 처음에는 왕실 도서관 기능을 했지만 정조는 이곳을 차츰 학술 및 정책 연구기관으로 변화시키며 학문 연구의 중심기관이자 개혁정책을 뒷받침하는 핵심 정치기관으로 거듭 태어나게 한 것이다.
“마땅히 한 전각을 세워서 송조의 건봉(虔奉)하는 제도를 따라야 하겠으나 열조(列祖)의 어제·어필에서 미처 존각에 받들지 못한 것을 송조에서 왕조마다 전각을 달리하는 것과 같게 할 필요가 없으니 한 전각에 함께 봉안하게 되면 실로 경비를 덜고 번거로움을 없애는 방도가 될 것이다. 너희 유사(有司)는 그 창덕궁의 북원(北苑)에 터를 잡아 설계를 하라’ 하고, 인하여 집을 세우는 것이나 단청을 하는 것을 힘써 검약함을 따르라고 명했는데 3월에 시작한 것이 이때에 와서 준공됐다.”
규장각은 본관 건물인 규장각과 주합루 이외에 여러 부속 건물로 구성됐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근처에 사무실에 해당하는 이문원을 뒀고 역대 왕들의 초상화 어필 등을 보관한 봉모당(奉謨堂)을 비롯해 국내 서적을 보관한 서고(西庫)와 포쇄(서책을 정기적으로 햇볕이나 바람에 말리는 작업)를 위한 공간인 서향각(西香閣), 중국에서 수입한 서적을 보관한 개유와(皆有窩), 열고관(閱古觀), 휴식 공간으로 부용정이 있었다. 이 중에서 개유와와 열고관에는 청나라에서 수입한 ‘고금도서집성’(5022책) 등을 보관했는데, 이런 책들은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양 문물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정조는 규장각을 세운 후 규장각의 연혁과 직제 등을 기록한 ‘규장각지(奎章閣志)’를 편찬하기도 했다. ‘홍재전서’에 규장각지를 편찬한 뜻이 나타나 있다.
“지(志)란 그 사실을 기록하는 것으로, 그런 사실이 있는데도 기록을 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고 혹 전해진다 해도 오래 못 가는 것이다.(…)내가 즉위 초에 규장각을 세우고 얼마 후 각신에게 지를 쓰도록 명했는데, 그로부터 5, 6년이 지나도록 지가 제대로 안 됐다. 이어서 편찬하는 데 느슨했을 뿐만 아니라 제도와 의식이 확립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와서는 대충 수립된즉 완성을 독려했다.”
1798년 정조는 스스로 자신의 호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온 냇물에 비치는 밝은 달과 같은 존재)’으로 정하는데, 이런 자부심의 바탕에는 규장각을 중심으로 수행한 정치, 문화운동의 성과를 확인하고 스스로 성인 군주가 되겠다는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
규장각은 창덕궁의 후원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에 있었다. 그만큼 정조의 관심이 컸기 때문이다. 창덕궁의 규장각을 찾아서 18세기 개혁정치를 진두지휘했던 정조와 정약용 박제가 이덕무 등 규장각을 거쳐 갔던 학자들의 열정을 만났으면 한다.
신병주 < 건국대 교수 >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www.itkc.or.kr)의 ‘고전포럼-고전의 향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18세기 후반 정조시대는 우리 역사에서 왕조 중흥과 문화 중흥의 꽃이 활짝 핀 전성기이자 ‘조선의 르네상스’로 평가받는다. 정조는 열한 살에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고 힘겹게 왕위에 올라 불안한 정치적 상황에 놓여 있었지만, 왕권 강화를 추진함으로써 이를 잘 극복했다.
이것을 뒷받침한 대표적인 기관이 바로 규장각(奎章閣)이다. 정조시대에 가장 중시된 정치적·문화적 기구인 규장각. 걸출한 학자들을 양성하며 문예 부흥을 주도하고 왕권 안정을 뒷받침했던 규장각을 설치한 과정이 ‘정조실록’(정조 즉위년 9월25일)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규장각을 창덕궁 금원(禁苑) 북쪽에 세우고 제학(提學) 직제학(直提學) 직각(直閣) 대교(待敎) 등 관원을 뒀다. 국조에서 관직을 설치한 것이 모두 송나라 제도를 따랐으니 홍문관은 집현원(集賢院)을 모방했고, 예문관은 학사원(學士院)을 모방했으며, 춘추관은 국사원(國史院)을 모방했으나 유독 어제(御製)를 존각(尊閣)에 간직할 바로는 용도각(龍圖閣)이나 천장각(天章閣)과 같은 제도가 있지 않았다.”
그런데 정조 이전인 세조대에 양성지(梁誠之)에 의해 규장각 설치가 제창된 적이 있었다. 숙종대인 1694년(숙종 20)에는 종정시(宗正寺)에 작은 건물을 별도로 지어 규장각이라 쓴 현판을 걸기도 했다.
“세조조(世祖朝)에 동지중추부사 양성지가 아뢰기를 ‘군상(君上)의 어제(御製)는 운한(雲漢)과 같이 하늘에 밝게 빛나니 만세토록 신자(臣子)는 마땅히 존각(尊閣)에 소중히 간직할 바이기 때문에 송조(宋朝)에서 성제(聖製)를 으레 모두 전각을 세워서 간직하고 관직을 설시하여 관장하게 했습니다. 바라건대 신 등으로 하여금 어제 시문(詩文)을 교감해 올려서 인지각(麟趾閣) 동쪽 별실에 봉안하되 규장각이라 이름하고, 또 여러 책을 보관한 내각(內閣)은 비서각이라 이름하며, 다 각기 대제학 직제학 직각 응교 등 관원을 두되 당상관은 다른 관직이 겸대하고 낭료는 예문관 녹관(祿官)으로 겸차(兼差)해 출납을 관장하게 하소서’ 했는데 세조가 빨리 행할 만하다고 일컬으면서도 설시할 겨를이 없었다. 숙종조에는 열성의 어제(御製)·어서(御書)를 봉안하기 위해 별도로 종정시에 소각(小閣)을 세우고 어서한 ‘규장각’ 세 글자를 게시했는데, 규제(規制)는 갖추어지지 않았었다.”
규장각은 정조가 ‘계지술사(繼志述事· 선왕의 뜻을 계승하여 정사를 편다)’의 명분 아래 재탄생시켰다. 처음에는 왕실 도서관 기능을 했지만 정조는 이곳을 차츰 학술 및 정책 연구기관으로 변화시키며 학문 연구의 중심기관이자 개혁정책을 뒷받침하는 핵심 정치기관으로 거듭 태어나게 한 것이다.
“마땅히 한 전각을 세워서 송조의 건봉(虔奉)하는 제도를 따라야 하겠으나 열조(列祖)의 어제·어필에서 미처 존각에 받들지 못한 것을 송조에서 왕조마다 전각을 달리하는 것과 같게 할 필요가 없으니 한 전각에 함께 봉안하게 되면 실로 경비를 덜고 번거로움을 없애는 방도가 될 것이다. 너희 유사(有司)는 그 창덕궁의 북원(北苑)에 터를 잡아 설계를 하라’ 하고, 인하여 집을 세우는 것이나 단청을 하는 것을 힘써 검약함을 따르라고 명했는데 3월에 시작한 것이 이때에 와서 준공됐다.”
규장각은 본관 건물인 규장각과 주합루 이외에 여러 부속 건물로 구성됐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근처에 사무실에 해당하는 이문원을 뒀고 역대 왕들의 초상화 어필 등을 보관한 봉모당(奉謨堂)을 비롯해 국내 서적을 보관한 서고(西庫)와 포쇄(서책을 정기적으로 햇볕이나 바람에 말리는 작업)를 위한 공간인 서향각(西香閣), 중국에서 수입한 서적을 보관한 개유와(皆有窩), 열고관(閱古觀), 휴식 공간으로 부용정이 있었다. 이 중에서 개유와와 열고관에는 청나라에서 수입한 ‘고금도서집성’(5022책) 등을 보관했는데, 이런 책들은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양 문물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정조는 규장각을 세운 후 규장각의 연혁과 직제 등을 기록한 ‘규장각지(奎章閣志)’를 편찬하기도 했다. ‘홍재전서’에 규장각지를 편찬한 뜻이 나타나 있다.
“지(志)란 그 사실을 기록하는 것으로, 그런 사실이 있는데도 기록을 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고 혹 전해진다 해도 오래 못 가는 것이다.(…)내가 즉위 초에 규장각을 세우고 얼마 후 각신에게 지를 쓰도록 명했는데, 그로부터 5, 6년이 지나도록 지가 제대로 안 됐다. 이어서 편찬하는 데 느슨했을 뿐만 아니라 제도와 의식이 확립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와서는 대충 수립된즉 완성을 독려했다.”
1798년 정조는 스스로 자신의 호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온 냇물에 비치는 밝은 달과 같은 존재)’으로 정하는데, 이런 자부심의 바탕에는 규장각을 중심으로 수행한 정치, 문화운동의 성과를 확인하고 스스로 성인 군주가 되겠다는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
규장각은 창덕궁의 후원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에 있었다. 그만큼 정조의 관심이 컸기 때문이다. 창덕궁의 규장각을 찾아서 18세기 개혁정치를 진두지휘했던 정조와 정약용 박제가 이덕무 등 규장각을 거쳐 갔던 학자들의 열정을 만났으면 한다.
신병주 < 건국대 교수 >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www.itkc.or.kr)의 ‘고전포럼-고전의 향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