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 회장은 줄곧 ‘10년 준비론’을 강조해왔다. 1997년엔 “10년 앞을 내다보면서 세계 표준이 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 그룹의 경영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했고, 2004년엔 “현실도 걱정이지만 10년 후가 더 고민”이라고 토로했다.

미래 대비의 필요성은 위기의식과 긴장감으로도 이어졌다. 이 회장은 2010년 “현재 삼성전자를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10년 안에 대부분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미국에서 시작한 반도체가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왔지만 머지않아 다른 나라로 가게 될 것”이라고까지 단언했다. 이어 “앞선 자를 뒤따르던 쉬운 길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하는 선두에 서 있다”며 “신수종 사업을 마련하는 데 더 이상 머뭇거려서는 안된다”고 분발을 촉구했다.

이런 과정에서 탄생한 게 5대 신수종 사업이다. 2010년 5월 삼성은 2020년까지 23조3000억원을 투자해 태양전지와 자동차용 배터리, LED(발광다이오드), 바이오 제약, 의료기기 등 5대 분야를 그룹의 미래 먹거리로 육성하겠다고 발표했다. 2020년까지 5대 사업에서 50조원의 매출을 올리고 4만5000명의 고용을 창출하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선두는 의료사업

5대 신수종 사업 중 가장 먼저 궤도에 오른 분야는 의료기기다. 삼성은 일찌감치 1984년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과 ‘삼성GE의료기기’를 세웠다. 하지만 GE와의 합작은 17년 만인 2001년 깨졌다. 외환위기 탓이 가장 컸다.

한 번의 실패를 딛고 삼성은 2010년 5월 다시 의료기기 사업에 승부를 걸었다. 2010년 6월 혈액검사기를 출시한 데 이어 9월에는 엑스레이 장비 제조업체 레이를 인수했다. 작년 초에는 초음파진단기 제조업체 메디슨을 인수했다.

그 뒤 삼성전자는 삼성메디슨,레이 등과 함께 디지털 X-레이,자기공명영상진단장치(MRI) 개발에 집중했다. 초음파 생산과 개발은 삼성메디슨에서,MRI와 컴퓨터단층촬영(CT) 등의 개발은 삼성전자 내 HME사업팀에서 나눠 맡는 식이다.

지난 2월에는 병원 규모에 따라 고를 수 있는 다양한 모델의 디지털 엑스레이를 선보였다. ‘XGEO GC80’은 촬영 빈도가 높은 중대형 병원을 겨냥했다. 뛰어난 영상처리 기술로 진단 정확도는 높이고 방사선량은 낮췄다. 삼성의 ‘소프트 핸들링’ 기술을 접목, 방사선사들이 손쉽게 기기를 작동할 수 있도록 했다. 공간 제약이 있는 중소형 병원을 대상으로 한 ‘XGEO GU60’은 별도 촬영실 공사 없이 설치할 수 있도로 설계했다.

수출 길도 열었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일본 병원 건설 1위인 도다건설이 세우는 병원에 삼성의 공기제균기술을 적용한 SPi(S-Plasma ion) 기기를 설치하는 협약을 체결했다. SPi 기기는 작은 상자 모양의 제품이다. 건물 제균을 위한 공조시설을 도입할 때 대대적인 공사 없이 SPi 기기만 설치하면 제균 시스템이 완성돼 편리하다. 삼성과 도다건설은 병원·노인시설을 시작으로 주택, 교통수단, 공공 건물, 학교, 점포 등에도 SPi 기기를 도입할 계획이다.

◆바이오도 본격 시동

바이오 사업에서도 속도를 내고 있다. 삼성은 작년 4월 미 퀸타일즈와 함께 바이오시밀러(바이오복제약) 등의 생산을 위한 삼성바이오로직스를 세웠다. 바이오시밀러는 특허가 만료된 오리지널 바이오 의약품을 복제해 동등한 품질로 만든 의약품이다. 개발 기간이 짧아 가격이 싼 게 장점이다. 주사로 체내에 주입한다는 점에서 입으로 약을 복용하는 합성의약품 복제약인 제네릭과도 다르다.

지난 2월엔 바이오시밀러 개발에서 판매까지 담당하는 합작사를 추가로 만들었다. 미국 제약기업인 바이오젠 아이덱과 손잡고 ‘삼성바이오에피스’라는 합작 법인을 출범시켰다. 1978년 설립된 바이오젠 아이덱은 신약 및 바이오 의약품 개발과 생산을 모두 할 수 있는 글로벌 제약사다. 앞으로 바이오시밀러 생산은 삼성바이오로직스와 바이오젠 아이덱이 공동으로 맡는다.

양사가 가진 삼성바이오에피스 지분은 각각 85%, 15%다. 삼성바이오에피스 초기 자본금은 3300억원이다.

삼성바이오에피스는 앞으로 류머티즘 관절염 등 자가면역질환과 암 치료용 바이오시밀러를 개발하는 데 주력할 방침이다. 독자적으로 개발해온 세포주를 공동 활용, 임상시험을 진행하고 미국식품의약국(FDA) 등 선진 규제기관의 승인을 얻어 바이오시밀러 제품을 세계 시장에 판매할 계획이다. 오는 10월 인천 송도에 본사와 연구·개발(R&D)센터를 완공하고 100명 규모인 직원 수를 연내 200명 이상으로 늘릴 예정이다.

정인설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