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수년간 줄기차게 같은 내용만 강의하는 노교수가 있었다. 너덜너덜해진 강의노트를 정리하던 조교가 넌지시 건의했다. “이참에 내용도 새로 한 번 다듬는 게 어떻겠습니까.” 가당치않다는 듯 조교를 바라보던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 진리가 변하는 것 봤나?” 학생들 리포트를 선풍기에 날려서 가까운 곳에 떨어지면 A, 먼 곳에 떨어지면 D학점을 줬다던 시절 얘기다.

당시 학점에 대범했던 건 교수나 학생이나 마찬가지였다. 학교 공부를 제쳐두고 이념 서적만 읽다가 학사경고를 받았다는 무용담이 횡행했다. 평균학점 2.0 아래만 가입자격을 주는 동아리까지 있었다. C D F가 어지럽게 적힌 성적표를 받아들고는 서로 위로한답시고 막걸릿집으로 몰려가 외상술을 마셔댔다. 요즘엔 학기 말 성적 정정기간만 되면 교수들은 들들 볶인다. 학생들의 ‘민원’이 밀려들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함께 연구실로 찾아와 점수를 올려주기 전엔 가지 않겠다고 생떼를 쓰는 경우도 있단다.

일부러 졸업을 미루고 한 학기 또는 1년 더 다니는 ‘대학 5학년생’도 늘고 있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패러디한 ‘학점 헤는 밤’이란 우스개까지 나돈다. ‘계절학기를 수강하는 여름·겨울에는 재수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성적표에 하나 둘 새겨지는 학점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학점 수가 너무도 다양한 까닭이요, 플러스 마이너스가 너무도 복잡한 까닭이요, 헤아려봐야 밑의 평균과 다르지 않은 까닭입니다./A 하나에 기쁨과/B 하나에 안도와/C 하나에 씁쓸함과/D 하나에 괴로움과/F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대학 평균 졸업 학점이 ‘지나치게’ 높아졌다고 한다. 전국 182개 4년제 대학의 올해 졸업생 중 평균 B학점을 넘는 비율이 89.4%에 달했다는 게 교육부 발표다. 10명 중 9명이 B 이상을 받은 셈이다. 재학생은 평균 B학점 이상이 72.9%로 졸업생보다 16.5%포인트 낮았다. 졸업생 학점이 좋은 것은 재수강을 통한 ‘학점 성형’이 널리 이뤄지기 때문이란다. 강의평가제 도입으로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잘 보이려고 후한 점수를 남발한 탓도 있다고 한다.

너도 나도 좋은 점수를 받다보니 학점 불신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기업 인사담당자의 30%가 학점을 가장 변별력 없는 ‘취업 스펙’으로 꼽았다는 조사만 봐도 그렇다. 오히려 실력 있는 학생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것이다. 대학 진학률 80%의 기형적 교육체제 아래서 생긴 폐해이기도 하다. 학생 학부모 학교 모두 피해자가 되는 학점 인플레의 악순환 고리를 어떻게 끊어야 할지.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