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포럼] 보쩌둥(薄澤東)의 종말
보쩌둥(薄澤東)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튄 게 문제였다. 공산당 원리주의자로 변신했다가 해임된 보시라이(薄熙來) 전 중국 충칭시 당서기 얘기다. 충칭시민들은 그의 성(姓)인 보에 마오쩌둥(毛澤東)의 쩌둥을 붙여 불렀다. 그는 2007년 충칭시 서기에 부임하자마자 가난한 집 아이들 130만명에게 매일 우유와 빵을 배급했다. 1000만명 가까운 농민의 신분을 도시민으로 전환해 더 좋은 복지혜택을 받게 했다. 빈곤층의 민생안정을 정책의 최우선으로 삼았다.

반면 대중 위에 군림하던 관리들에겐 소위 삼진삼동(三進三同)을 요구했다. 하급단체와 농촌 혹은 농가로 내려가 그곳에서 먹고 자고 노동하며 정신을 개조토록 한 것이다. 폭력조직과 그 뒤를 봐준 권력가들을 소탕하기도 했다. 특권보다는 평등, 선부론(先富論)보다는 민생우선론을 실천하려는 그의 ‘충칭모델’에서 가난한 시민들은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혁명노래 부르기 캠페인이 벌어지고, TV 오락프로그램 방영이 금지되는 사상통제에도 불구하고 충칭모델은 ‘중국경제의 새로운 성장모델’(홍콩경제일보)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보시라이의 승부수 충칭모델

충칭모델은 보시라이가 최고 권부에 오르기 위해 목숨을 걸고 꺼내든 카드였다. 그는 본래 ‘붉은 귀족’이다. 아버지인 보이보(薄一波)는 8대 혁명원로 중 한 명이다. 베이징대를 졸업한 보시라이가 다롄시장과 랴오닝성 서기를 거쳐 상무부장(장관)을 지낼 때까지 그의 입신양명을 의심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화려한 경력과 막강한 집안배경으로 그는 태자당(혁명원로의 자제)의 대표로 꼽혔다.

그러나 2007년 17차 공산당대회에서 최고 권력집단인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9명 안에 들지 못하고 충칭시 서기로 밀려났다. 태자당과 상하이방(장쩌민 전 주석파), 그리고 후진타오 주석의 공청단파 간 계파 경쟁에서 밀렸다는 게 중론이다. 그는 5년 뒤인 올해 18차 공산당대회를 겨냥해 절치부심했다. 이때부터 그가 주목한 것이 빈부격차다. 중국은 사회적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가 0.5로 폭동 직전단계에 달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불만에 가득찬 대중에 아부하는 포퓰리즘 전략은 계산대로 먹혀들었다. 그는 ‘극좌 행보’로 단숨에 중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스타정치인이 됐다.

좌파도 거부한 포퓰리즘

그러나 단기 성과에 목을 맨 만큼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충칭모델은 포퓰리즘을 기반으로 한 사상누각이었다. 작년 충칭시의 재정 수입은 2900억위안이지만 지출은 3900억위안이나 돼 1000억위안의 적자가 발생했다. 국유기업에 국가 소유 토지를 싸게 공급하는 대신 기업들에 돈을 거둬들여 민생자금으로 쓰기도 했다. 성장동력이 없는 복지모델은 눈속임에 불과했다. 중국의 원로경제학자 우징롄이 “충칭모델은 중국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고 일갈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 서기는 결국 해임됐다. 권력투쟁의 산물이라고만 단정하는 시각은 옳지 못하다. 태자당과 상하이방, 그리고 공청단파의 권력투쟁이 끼어들어 복잡한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충칭모델은 혹세무민하는 사이비종교 같은 것이라는 지도부의 인식이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좌파로 분류할 수 있는 리커창 부총리조차 그가 해임된 직후 “중국의 개혁개방은 지속돼야 한다”며 충칭모델을 부정했다. ‘보시라이 드라마’에는 대중의 인기보다도 국가의 영속성과 발전을 추구하는 중국 지도부의 냉정함이 드러나 있다.

조주현 논설위원 fore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