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간) 한국계인 김용 다트머스대 총장을 세계은행 차기 총재 후보로 지명한 것은 세계 빈곤과 질병 퇴치에 기여한 그의 전문성을 높이 산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경제력이 급부상하면서 세계은행에서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신흥국가들을 의식, 아시아계인 김 총장을 추천한 측면도 있다는 게 백악관 주변의 해석이다.

◆오바마, 친구처럼 소개

오바마 "김용, 개도국 성장에 헌신…가장 이상적인 세계銀 총재"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 로즈가든 기자회견장에서 김 총장을 오른쪽 옆에 나란히 세운 채 그의 지명을 공식 발표했다. 그는 “김 총장은 평생을 개발도상국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세계 보건을 위해 헌신했다”고 지명 배경을 밝혔다. 세계은행은 금융과 기술 지원 등을 통해 저개발국의 경제 개발을 돕는 국제기구여서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어 “김 총장은 세계보건기구(WHO) 에이즈국장, 하버드대 국제보건 사회의학과장 등으로서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20년 이상 저개발국 개발에 앞장서왔다”며 “이런 독특한 경험을 가진 그는 이상적인 세계은행 총재 후보”라고 거듭 강조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김 총장을 친구처럼 소개해 김 총장의 웃음을 자아냈다. 그는 “김 총장이 고등학교 시절 풋볼 쿼터백으로 활동했고, 골프 핸디가 5개”라면서도 “그의 핸디에 대해서는 조금 화가 난다”고 말했다. 김 총장은 지난해 가을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을 국빈방문했을 때 백악관 만찬에 참석해 오바마 대통령을 만난 인연도 있다.

기자회견장에는 세계은행 총재 유력 후보로 거론됐지만 고사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과 다트머스대 출신인 티머시 가이트너 재무장관도 배석했다. 두 사람이 김 총장을 적극 추천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워싱턴포스트는 김 총장을 가장 먼저 추천한 사람이 클린턴 국무장관이었다고 전했다. 그의 남편인 빌 클린턴 전 대통령도 이날 발표한 성명에서 “탁월한 선택”이라며 김 총장을 강력 지지했다.

미국 교포들도 환영했다. 뉴욕 모건스탠리에서 근무하는 한국계 프라이빗뱅커 크리스 정 이사는 “반기문 유엔(UN) 사무총장에 이어 또 한 명의 한국인이 거대 국제 기구의 수장이 됐다는 것을 굉장히 고무적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인이 세계 금융계의 주요 보직을 차지한 만큼 월스트리트에서도 한국계의 위상이 많이 올라갈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신흥국 후보들과 경쟁해야

이날 차기 총재후보 신청을 마감한 세계은행은 엄격한 심사를 거쳐 로버트 졸릭 총재의 후임자를 확정해 발표할 예정이다. 1945년 이후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유럽인이, 세계은행 총재는 미국인이 도맡아왔다. 경제력을 반영한 관행이자 양측 간 신사협정이었다. IMF와 세계은행에서 미국은 개별 국가 기준으로 최대 지분을 갖고 있다.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의 지분을 모두 합하면 미국보다 많다.

미국은 이번에도 자국 인물을 세계은행 총재 자리에 앉히려고 한다. 학계에선 제프리 삭스 컬럼비아대 교수가 미 정부의 의지와 무관하게 독자 출마했다. 하지만 중국과 인도 브라질 등 신흥국과 개발도상국은 미국의 세계은행 총재직 독식을 반대하고 있다. 때문에 나이지리아 여성 재무장관인 응고지 오콩조-아이윌라와 전 콜롬비아 재무장관인 호세 안토니오 오캄포를 대항마로 내세웠다.

미국은 이런 신흥국과 개발도상국의 반발을 무마하는 전략에서 김 총장 카드를 전격 제시한 것으로 분석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백악관이 그를 지명한 이상 차기 총재 자리에 오를 게 거의 확실시된다고 내다봤다. 세계은행 총재의 임기는 5년이다.

지난해엔 성추문으로 물러난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IMF 총재 후임 자리를 놓고 유럽과 신흥국 및 개발도상국이 충돌했다. 결국 미국의 강력한 지지를 받은 크리스틴 라가르드 전 프랑스 재무장관이 IMF 총재 자리를 차지했다.

워싱턴=김홍열 특파원 com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