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열 LS전선 회장 "사이클, 올림픽 첫 메달 기대하세요"
구자열 LS전선 회장(59)을 처음 만난 것은 작년 9월 LS 내부 행사에서다. 여느 대기업 회장들처럼 그에게 접근하는 게 쉽지 않았다. 겹겹이 둘러싼 수행원들 때문이 아니었다. 그와 대화하고픈 일반 직원들이 줄을 선 까닭에 명함을 꺼내지도 못했다. 화장실 가는 그를 막아선 채 “회장님, 같이 사진 한번 찍어주세요”라고 달려드는 신입사원들을 뚫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구자열 LS전선 회장 "사이클, 올림픽 첫 메달 기대하세요"
첫 만남에서 구 회장의 두터운 젊은 팬층에 놀랐다면 올초 두 번째 만남에선 그의 소탈한 이미지가 마음에 남았다. 수행원 한 명 없이 외부 모임에 참석하더니 행사가 끝나자 다른 회장들 다 보내고 행사장 뒷정리까지 하고 자리를 떴다.

저마다 느끼는 뉘앙스는 다르겠지만, “가야 할 때가 언제인지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이형기 시인의 ‘낙화’ 첫 구절이 떠올랐다.

그리고 세 번째 만남. ‘오늘은 뭘로 나를 놀라게 할까’ 하는 기대감으로 그를 봤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부터 ‘풀빵주’에 “빵” 터졌다.

“풀빵 먹어 봤어요? 풀빵은 밀가루 반죽을 남김 없이 틀에 정확히 붓는 게 중요해요. 맥주 한 병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정확히 맥주잔 네 잔에 나눠 넣는 게 이 풀빵 폭탄주의 핵심입니다.”

맥주잔 네 개로 정사각형을 만든 뒤 소주를 정량 배분했다. 이어 현란한 손목 스냅으로 맥주병을 흔들어 거품을 낸 다음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며 세 번 정도에 걸쳐 나눠 따르니 정확히 네 잔이 채워졌다. 맥주병에는 한 방울의 맥주도 남지 않았고, 그 어떤 잔도 맥주가 넘치지 않았다.

풀빵 거품을 신기해 하는 참석자들이 풀빵주 제조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기술도 기술이었지만 풀빵 같은 구 회장의 푸근한 품성이 느껴졌다.

그래도 폼나는 인터뷰를 생각했지만 약속 장소는 세계 3위 전선업체 총수의 단골집 치고는 소박했다. 서울 원효로 3가의 해물 전문점 ‘본가’. 초행자에게는 찾기 힘들 정도로 출입구가 작은 식당 안은 손님들로 왁자지껄했다.

▶풀빵주는 좋은데 식당이 좀 시끄럽네요.

구자열 LS전선 회장 "사이클, 올림픽 첫 메달 기대하세요"
“여긴 맛으로 승부하는 곳이에요. 오늘은 ‘맛있는 만남’이니 먹는 데 주력합시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다와 육지를 넘나드는 메뉴들이 나왔다. 삼겹살에 이어 아귀찜이 상에 올랐고 간장게장이 뒤따랐다. 이 집의 장기인 생태찌개가 방점을 찍었다.

▶삼겹살이 ‘애피타이저’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김치와 깻잎이 맛있어 초장부터 한 그릇 다 비웠는데 억울하네요.

“나도 여기 반찬을 너무 좋아해요. 해외출장을 다녀오면 이 집 김치와 깻잎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곧장 이곳을 찾죠. 한 가지 음식을 많이 먹는 것보다 오늘처럼 맛있는 여러 음식을 조금씩 맛보는 게 훨씬 낫지 않나요.”

이런 ‘다품종 소량’ 섭취는 그의 취미생활에서도 나타난다. 구 회장은 초등학교 때 야구 포수를 했고, 대학 때는 테니스를 즐겼다. 골프는 전성기에 싱글 수준이었고, 50대 후반의 나이에도 최상급 코스에서 스노보드를 탄다. 자녀들이 다 자라 스노보드를 같이 탈 사람이 없자, 손주들이 빨리 커 같이 타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다고 한다. 사진 전문가에 바둑도 수준급이다.

▶취미 범위가 너무 넓은 것 아닌가요.

“요즘은 음악과 사이클에 집중하고 있죠.”

▶음악 매니아로 음반을 상당히 많이 갖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레코드판(LP)은 2만장이 넘는 것 같습니다. CD도 1만장 이상이고요. 중학교 동창인 가수 김창완도 와서 함께 음악을 듣곤 합니다.”

옆에 있던 이광우 ㈜LS 사장은 “회장님이 손수 다 정리해서 어떤 음반이 어디 있는지 다 알아요. ‘아 그 노래 왼쪽 세 번째 칸에 있어’ 이런 식이죠”라고 거들었다.

▶사이클 CEO(최고경영자)로도 유명하신데요.

“최근 사이클 동호회원들과 함께 4대강을 종주했습니다. 막내딸이 자전거를 좋아해서 같이 타기도 하죠. 그래도 당분간 알프스 같은 곳을 가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는 2002년 자전거로 해발 3000m가 넘는 스위스 알프스 산맥을 넘는 ‘트랜스 알프스’ 대회에 참가했다. 7박8일간 650㎞를 완주하는 코스다. 험난한 절벽이 많아 기권자가 속출했지만, 그는 완주에 성공했다.
당시 부인 이현주 씨가 냉수를 떠놓고 매일 남편의 무사 완주를 기도하다 보니 자신의 이름을 ‘완주’로 착각할 정도였다는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자전거 사고가 크게 난 일도 있었다면서요.

“고등학교 2학년 때 일이죠. 동생(구자용 E1 회장)과 자전거를 타고 장충체육관에서 약수동 쪽 내리막을 달리다 택시와 부딪쳤어요. 머리가 택시 뒷유리창에 박혀 머리뼈가 함몰될 정도로 큰 사고였습니다.”

구 회장은 이 일로 6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다. 수술 직후 아버지인 구평회 E1 명예회장은 “다시는 타지 말라”며 자전거를 내다버렸다. 하지만 그는 다시 자전거 안장에 올랐다. 학창 시절부터 40여년간 스포츠를 즐겨온 삶의 결실이 바로 ‘꿀벅지’다. 그의 장딴지와 허벅지를 만져 보니 정말 “헉” 소리가 났다. “회장님, 정말 이만기가 울고 가겠는데요.”

▶사이클연맹 회장도 맡고 계시죠.

“2009년 협회분들이 와서 부탁해 고민 끝에 하기로 했습니다. 비인기 종목인데 한번 살려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어요. 한 번도 올림픽에서 메달을 못 땄는데 이제 때가 됐다고 생각해요. 이번 런던올림픽에서 조호성 선수한테 기대해도 좋을 것 같아요.”

▶동생에게 골프협회 회장을 권했다고요.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회장을 해보라고 했죠. 동생 성격으로 보나 골프 실력으로 보나 충분하니까요. 게다가 E1이 한국에서 제일 큰 LPG(액화석유가스) 회사잖아요. 한국LPG협회를 영어로 하면 LPG 앞뒤로 Korea와 association을 붙여 KLPGA쯤 되겠죠. 이미 태생적으로 (동생은) KLPGA 회장을 맡을 운명이라고 했죠. 대번에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프로스펙스, 국가 대표 스포츠 브랜드로 키우겠다"

▶삼형제가 모두 고려대 출신인데요.

“고등학생 때 가정교사 영향이 컸죠. 그 양반을 좋아했는데 고려대를 나왔어요. 또 고교(서울고) 2학년 방학 때 충남 공주에 있는 갑사에 들어가 공부를 했는데, 그 가정교사의 대학 친구를 거기서 만났죠. 정종환 전 국토해양부 장관입니다. 암자에서 같이 공부하다 보니 형, 아우 하는 사이가 됐어요. 그때 인연으로 정 전 장관은 행정고시 볼 때 우리집에 묵었어요. 지금도 (정 전 장관과는) 친분이 두텁습니다.”

구 회장은 경영학과 72학번, 구자용 회장은 무역학과 73학번, 셋째인 구자균 LS산전 부회장은 법학과 76학번으로 모두 고려대 동문들이다.

▶문과 출신인데 울산과학기술대 이사장도 맡고 있습니다.

“LS전선을 맡다 보니 자연스럽게 과학계 인사들과 친해졌어요. 전국경제인연합회 과학기술위원장과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을 하다 조무제 울산과기대 총장을 알게 됐죠. 조 총장이 울산과기대 이사를 맡아 달라 해서 응했는데 갑자기 전임 이사장이 그만둔다는 거예요. 조 총장이 대뜸 ‘나밖에 할 사람이 없다’고 해서 처음엔 사양했지만 결국 받아들였죠. 맡은 김에 세계적인 대학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LS전선 상황은 어떻습니까.

“전선업은 케이블을 만드는 단순 제조업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본질적으로는 전기와 정보를 전달해주는 물류업입니다. 미래에 뜰 고부가가치 산업이라는 거죠. 한물 간 게 아니예요. 본업에 가장 신경을 많이 써요. 2008년 인수한 미국 슈페리에에식스도 3년 만에 흑자로 돌려놨습니다. 우리가 이제 세계 3위인데 1위로 올라설 때까지 겸손하게 열심히 할 것입니다.”

▶LS네트웍스 이사회 의장도 맡고 있는데요.

“LS네트웍스는 그룹에서 거의 유일하게 소비재 산업을 하고 있죠. 모두들 기존 사업이나 잘 하자면서 인수에 반대하는 분위기였죠. 그런데 지금 프로스펙스 등 잘 되잖아요. 앞으로 국가를 대표하는 스포츠 브랜드로 키울 거예요.”

▶3세 경영은 언제쯤 시작될까요.

“이번에 아들이 미국에서 학교를 마치는데 우리 회사에는 안 들어오게 할 거예요. 기업분석을 배울 수 있는 분야에서 좀 더 공부를 시킬 것입니다. 이런 질문이 나오는 것 보니 이제 자리를 옮길 때가 됐네요. 맥주나 마시러 가죠. 내가 노래 한 곡 부를 게요.”

구 회장은 2차에서 나온 모든 얘기에 대해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를 요청했다. “한경에 ‘맛있는 만남’ 외에 ‘노래 있는 만남’이라는 코너가 생기면 오프를 풀겠다”고 농을 던졌다. 다만 2차 자리에 회장의 절친인 가수 김창완 씨가 나타나 신곡을 발표했다는 사실은 오프 사항에서 제외했다.


구자열 회장의 단골집 본가

아귀찜·코다리찜 등 해물 전문점…삼겹살도

본가는 아귀찜이 간판 음식인 해물 전문점이다. 이태원과 여의도를 거쳐 2002년부터 원효로에 자리잡았다. 40석밖에 안 되는 소규모 식당이지만 메뉴는 다양하다.

아귀찜은 4만원(중)~4만5000원(대)으로, 콩나물을 빼면 거의 먹을 게 없는 3만원대 아귀찜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푸짐한 살코기를 배어 먹는 맛이 일품으로, 상당수 단골을 확보하고 있다는 게 최명자 사장의 전언. 아귀찜 가격이 다소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동태찌개(6000원)나 생태찌개(1만원)를 자주 찾는다. 회식 자리라면 아귀찜으로 시작해 동태찌개나 생태찌개로 마무리하는 코스를 권할 만하다. 아귀찜을 대신할 메뉴로 코다리찜(2만5000원)도 있다.

해물 위주 식단이지만 삼겹살(1만2000원)도 판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의외로 삼겹살과 동태찌개 코스를 많이 찾는다. 서울 원효대교 북단 국민은행 원효지점 맞은편에 있다. 영업시간은 오전 11시~밤 10시. 일요일에도 문을 연다. (02)714-6264

정인설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