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칼럼] 국민연금이 어째 당신들 것인가
올해의 주총꾼을 꼽으라면 단연 국민연금이다. 안건을 확정할 땐 아무 소리 없더니 정작 주총이 열리자 느닷없이 훼방을 놓아 상장사들이 애를 먹어야 했다. 기업들이 정관을 제멋대로 바꾸려 했던 게 아니다. 개정된 상법을 정관에 반영시키려 했을 뿐이다. 이사들의 책임을 줄여줘 기업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자는 취지인데, 국민연금은 주주 가치를 훼손한다며 반대했다. 주총장이 황당해졌다.

국민연금은 주주권을 행사한다면서도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의 의결을 거치지 않았다. 고민한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물론 정치권의 압력을 버티기 힘들다는 건 잘 안다. 주주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민·형사상 책임을 묻겠다는 시민단체들의 겁박도 무시무시하다. 하지만 그렇게 등 떠밀린 주주권 행사가 정상일 리 없다.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을 몰아내려던 2008년, 2011년의 시도가 그런 경우였다. 국민연금은 정 회장에 대한 법원의 판결이 주주가치를 훼손할 수 있다며 이사 연임을 반대했다. 현대차 지분을 대폭 축소하기까지 했다. 정 회장의 리더십 아래 현대차가 꿈도 꾸지 못하던 글로벌 플레이어로 올라서던 시점이다. 현대차 주가는 실적 향상과 더불어 4만원대에서 25만원대로 수직상승했다. 손해를 본 것은 결국 가입자들이다. 멋쩍게 된 국민연금의 변명이 한심하다. “기계적인 판단이었을 뿐”이라니.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를 이슈화시킨 사람은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이다. 해외에서 애플의 아이폰과 구글이 선풍을 일으키던 시점이다. “삼성은 구글의 하청업체로 전락할 것”이라는 안철수 교수의 악담을 곽 위원장이 들었던 모양이다.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를 강조하면서 “삼성이 충분히 예견된 스마트폰 쇼크에 이제서야 당황하고 있는데 안철수 교수님 같은 분이 국민연금 측 사외이사였다면 충분히 지적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안 교수와 곽 위원장이 그토록 걱정을 해준 덕분인지 삼성은 지난해 세계 1위의 스마트폰 기업이 됐다.

곽 위원장은 뭐라고 변명을 했을까. 기자들이 물었다. “지난해에는 삼성이 안타깝다더니 지금은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곽 위원장의 답이다. “작년에는 50점 미만이었는데 올해는 90점 이상입니다.” 애들 장난도 아니고, 글로벌 기업 평가가 어떻게 단숨에 F학점에서 A학점으로 바뀔 수 있는가. 목숨까지 걸고 하는 것이 기업이다. 국내용 정치인이나 폴리페서의 눈으론 볼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 이런 사람들이 연기금을 동원해 기업에 영향력을 미치고 싶어하니.

[김정호 칼럼] 국민연금이 어째 당신들 것인가
주주권 행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입만 열면 미국의 캘퍼스(캘리포니아공무원연금)를 말한다. 1980년대 말부터 주주권 행사에 나서 IBM의 존 에이커스 회장, GM의 로버트 스템펠 회장 등 무수한 CEO를 몰아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연금이다. 헌데 느닷없는 일이 벌어졌다. 캘퍼스 이사회가 2004년 당시 회장이던 션 해리건을 표결로 퇴진시킨 것이다. 슈퍼마켓 노조 대의원 출신인 해리건을 캘퍼스 회장으로 지명한 사람은 민주당계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던 그레이 데이비스다. 노조의 지지를 업고 당선된 데이비스는 노조에 감사의 뜻으로 연금 지급액을 단번에 20~50% 올려줬다. 고속도로순찰 경찰관들 앞에서는 50세에 은퇴하면 마지막 연봉의 90%를 평생 지급하겠다는 선물 보따리까지 풀었다. 캘리포니아주 재정위기가 악화된 원인이다.

13명의 연금운용위원들도 모두 노조와 민주당 출신으로 물갈이됐다. 해리건은 캘퍼스를 조직적 노조운동의 본산으로 만들어갔다. 월트디즈니의 마이클 아이즈너 회장 등이 줄줄이 희생양이 됐다. 시간이 흐를수록 논란이 커졌다. 비난의 목소리도 높아지기 시작했다. 슈퍼마켓 기업인 세이프웨이의 CEO를 몰아내려던 시도에는 해리건의 개인 감정까지 개입됐다. 동료 이사들이 나섰다. “연금이 어째 당신 것인가.” 해임을 결의한 이사들의 볼멘 목소리였다.

국민들의 노후자금이다. 국가재정법은 연기금의 의결권이 기금의 이익을 위해 신의성실하게 행사돼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기업 군기잡기용쯤으로 여기고 있다. 심지어 재벌개혁의 수단으로까지 거론하고 있으니. 기업 지배구조 개선보다 연금 지배구조 개선이 더 시급한 이유다.

김정호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