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반값'과 공짜들의 역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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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호 지식사회부 차장 leekh@hankyung.com
정치의 목적은 권력 쟁취(선거 승리)에 있다. ‘나머지 모든 것’들은 후순위다. 선거가 임박한 정치인들의 ‘국민을 위한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불편한 진실’이다.
그래도 이쯤 되면 좀 심한 것 같다. 표 앞에서 난무하는 반값·공짜 복지 시리즈 얘기다. 애초부터 국민을 위해 내놓은 공약이 아닌 탓에 부작용이나 후유증은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뒷일이야 어떻게 되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표심만 얻어보자는 ‘닥치고 정치’의 ‘닥치고 공짜 복지’다.
반값·무상복지 후유증 속출
정치권과 정부가 판을 벌여놓은 반값과 공짜들의 역습이 시작됐다. 대학생들의 눈높이만 높여 놓은 ‘반값 등록금’은 대학과 학생들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오고 있다. 서울에 있는 한 유명 4년제 사립대는 올 1학기 15명의 교수를 채용했다. 작년 같은 기간엔 27명을 뽑았지만 올해는 등록금 인하와 장학금 증대에 따른 예산 부족으로 인원을 44% 줄였다.
“재단이 학교에 주는 지원금(법인전입금)은 한정돼 있어요. 그런데 기부금은 안 늘고 건물은 갈수록 많아져 매년 유지·관리비가 급증합니다. 지난해 전기료만 150억원이 나왔어요. 전년보다 50억원 늘었죠. 여기에 등록금까지 내린 만큼 복지 혜택을 줄일 수밖에 없고, 그 피해는 학생들에게 돌아가겠죠.”
전면 무상급식 확대로 인한 후유증도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학생들에게 공짜 식사를 주느라 엄청난 예산이 투입되고 있지만 상당수 학교는 돈이 부족해 난방비를 아끼느라 단축수업까지 한다.
“학교 운영경비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전기료를 줄이려면 추워도 난방을 줄여야 해요. 한겨울에도 실내온도를 17도 정도로 맞추는데 아이들이 (노스페이스 같은) 점퍼를 껴입지 않을 수 없죠. 추위가 심한 날엔 단축수업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력이 있는 학생들한테까지 무상급식을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서울 A중학교 K교장)
무임승차·모럴 해저드 부추겨
무상 보육의 부작용도 심각하다. 정부가 모든 0~2세 아동에게 어린이집 보육료(월 28만6000~39만4000원)를 주기로 하자 전업주부들까지 앞다퉈 신청하는 바람에 정작 아이를 맡겨야 할 맞벌이 부부들이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2세 이하 아동은 발달 단계상 엄마와 같이 있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게 교육 전문가들의 견해라는 점을 감안하면 무분별한 ‘공짜 심리’가 아이 교육을 망치고 있는 꼴이다.
올해부터 시행된 ‘만 5세 누리과정’(유치원·어린이집 공통교육과정)은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를 불러왔다. 유치원·어린이집에 다니는 만 5세 어린이를 둔 가정에 부모 소득과 관계없이 월 20만원(국·공립 유치원은 5만9000원)을 지원키로 하자 사립 유치원들이 각종 명목으로 유치원비를 올려 30만~40만원씩 받고 있다. 하지만 학부모들이 선호하는 공립 유치원 수는 턱없이 부족하다. 서울의 경우 공립 비율이 10%에 불과하다.
이런 공짜 심리와 모럴 해저드는 무책임한 정치권과 무기력한 정부의 합작품이다. 따지고 보면 대중을 현혹시켜 이득을 얻는 게 정치의 비즈니스 모델이기도 하다. ‘외상이면 사돈집 소도 잡아먹는다’는 식의 자세는 후환(後患)을 키울 뿐이다.
이건호 지식사회부 차장 leek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