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소득은 복지 위한 수단일 뿐
근년에 전 세계 거의 모든 사회들에서 소득 양극화가 심중한 문제가 됐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민중주의(populism)가 부쩍 높아진 현상도 상당 부분 소득 양극화에서 비롯했다. 총선과 대통령 선거 등 중요한 선거들을 앞둔 터라,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차분히 성찰해야 한다.

양극화의 여러 원인들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것은 불평등이 삶의 본질적 특질이라는 점이다.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종(種)들과 개체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잘 적응한 종들과 개체들의 후손들이 차지한다. 자연은 ‘승자가 거의 독식(winner-take-almost-all)’하는 사회다.

문화의 발전은 이런 불평등을 폭발적으로 늘렸다. 문화적 진화는 유전적 진화보다 훨씬 빠르다. 그래서 성공적인 아이디어들은 단숨에 온 세계로 퍼져서, 단숨에 큰 돈을 벌게 해준다.

경제 발전과 세계화는 이런 현상을 강화했다. 기술의 발전도 중간 관리직과 숙련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상대적으로 많이 줄여서 이런 추세를 강화한다. 소득 격차가 다른 산업들보다 훨씬 큰 금융산업의 발전도 거든다.

노인과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 사이에선 소득 격차가 평균보다 크다. 모든 사회들에서 수명이 길어지고 교육 수준도 높아지므로, 소득 격차는 늘어난다.

사회가 원숙해지면,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만 버는 ‘문턱 소득자(threshold earner)’가 늘어난다. 예컨대 혼자 사는 사람은 부양자가 있는 사람보다 일을 덜하는데, 우리 사회에서 1인 가구는 2000년의 220만명에서 2010년에는 410만명으로 가파르게 늘었다. 이런 추세도 소득 격차를 늘린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양극화라고 일컬어지는 현상은 삶의 본질적 부분이다. 그리고 문명과 사회가 발전하면 이런 추세는 커지는 성향이 있다.

따라서 그것을 없앨 수는 없다. 그것을 아예 없애려 하면, 삶 자체를 억제하고 약화시킨다. 고귀한 이상을 추구한 공산주의가 가장 사악한 제도로 판명된 사정이 이 점을 잘 보여준다.

그러면 소득의 양극화는 얼마나 큰 문제인가? 미국 조지메이슨대학의 타일러 코웬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이 일에선 소득과 복지를 구분하는 것이 긴요하다. 소득과는 반대로, 복지는 점점 격차가 줄어든다. 중세 사회에서 귀족과 평민은 복지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선 복지가 절대적으로 늘어나면서도 상대적 차이는 점점 줄어든다.

의식주, 교육, 의료에서 갑부들과 중산층이 누리는 혜택은 차이가 아주 작다.

사람에게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복지다. 소득은 복지를 얻는 수단이다. 소득 양극화가 복지 양극화로 이어지지 않으므로, 일단 소득 양극화의 심각성은 상당히 누그러진다. 아주 가난한 사람들을 구하는 사회안전망을 보다 튼튼하게 만들어 보다 넓게 치면, 급한 문제엔 일단 대응하는 셈이다.

현실적으로 소득 양극화는 여전히 심각한 문제다. 소득 양극화는 당장 사회적 이동성(mobility)을 줄인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모두 ‘부러워하는 동물’이라는 사실에서 나온다. 우리는 모든 일에서 자신을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남과 비교해서 평가한다. 자연히, 소득 양극화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체제에 대해 반감과 분노를 불러 일으킨다.

문제의 성격이 그러하므로, 대책이라 할 만한 대책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먼저, 관련된 사실들을 널리 알려서 시민들이 선동가에게 휘둘리지 않고 차분하게 판단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부당하게 큰 돈을 버는 사람들이 줄어들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깨끗하고 투명한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 부유한 사람들이 부당한 방식으로 돈을 벌었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면, 그 체제는 안정될 수 없고 전복의 기운이 퍼지게 된다.

복거일 < 소설가·객원논설위원 eunjo35@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