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이대 앞
한 신사가 구둣방에 들러 장화를 주문한다. 잔뜩 거드름을 피우던 이가 나가자 제화공은 그가 놓고 간 고급가죽을 뚝뚝 자른다. 주인은 기겁하지만 제화공은 괘념치 않는다. 잠시 후 신사의 하인이 나타나 장례용 슬리퍼를 요구한다. 신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구두가게 주인은 시몬이요, 제화공은 천사 미하일이다. 톨스토이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보듯 세상 일은 알 수 없다. 사람은 물론 코닥과 소니 노키아처럼 기울 일 없을 것 같던 곳이 맥없이 무너지거나 주저앉는가 하면, 한물갔다 싶던 곳이 되살아나는 일도 적지 않다.

상권도 그런 모양이다. 1990년대 말을 고비로 저물었던 이대앞 패션가가 부활 조짐을 보인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이대앞은 묘한 곳이다. 신촌기차역에서 이대입구 전철역까지 길지 않은 ㄴ자 중앙로와 뒷골목에 고만고만한 가게가 줄지어 있다. 품목도 거기서 거기다. 1층은 옷·신발·화장품·액세서리, 2∼3층은 미용실과 카페다.

패션가로 자리잡은 건 1970년대. 국내의 디자이너 브랜드 상당수가 이곳 양장점에서 출발했다. 양장점 대신 캐주얼의류 매장이 들어선 뒤에도 줄곧 명성을 유지하며 서울의 황금상권으로 여겨지던 이곳은 그러나 2005년 이후 빛을 잃었다.

인터넷 쇼핑이 확산되고 홍대앞 클럽문화가 젊은층을 끌어당기면서 주 고객층이 떠난 것이다. 인근 대형 패션몰의 실패와 글로벌 금융위기도 찬물을 끼얹었다. 그러던 게 근래 중국 대만 등에서 하루 평균 1000명 이상의 관광객이 모여들면서 분위기가 반전됐다는 것이다. 관광객 증가에 대한 분석은 여러 가지. 신촌역 앞에 대형버스 주차장이 생긴 데다 물건이 독특하고 품질 대비 가격도 좋다고 알려진 게 주요인이지만, 이대 정문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 부자가 된다는 소문도 한몫했다고 한다.

근원은 알 길 없다. ‘이화(梨花)’가 중국말로 ‘돈이 들어온다’는 뜻의 ‘리파(利發)’와 비슷한 데서 나왔다는 정도다. 기대가 성과를 만든다는 로젠탈효과도 있지만 사진을 찍으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란 희망과 자신감에 뭐든 대들어볼지 모른다. 용기와 도전에서 비롯된 결과임에도 불구, 사진 덕이라 믿으면 소문은 기정사실화돼 확대재생산될 가능성도 있다.

시장에도 스토리가 필요한 이유다. 그러나 긍정적 루머의 힘도 시장의 신뢰가 뒷받침돼야 이어진다. 이대앞에 가면 물건 좋고 값도 싸고 볼거리도 많다는 평을 유지해야 사진도 계속 위력을 발휘할 거란 얘기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