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알맹이 빠진 신용평가 개선안
“핵심 내용은 모두 빠진 채 겉핥기식 개선방안들만 늘어놓은 느낌입니다.”

지난 9일 금융위원회가 자본시장연구원과 함께 개최한 ‘신용평가 제도 개선을 위한 정책세미나’에서 한 증권회사 관계자가 세미나가 끝난 뒤 한 말이다. 한마디로 별 내용이 없다는 얘기다.

금융당국은 국내 신용평가시장 선진화를 위해 지난해 11월부터 태스크포스(TF)를 운영했다. 바닥으로 추락한 신용평가사의 신뢰도를 높이고 공정한 평가를 장려하기 위해서다. 이번 정책세미나는 그동안 TF에서 검토한 개선방안을 시장에 설명하는 자리였다.

내용은 기대 이하였다. 신용평가 수수료 체계를 개선하는 방안과 기업 신용평가를 신용평가사가 돌아가면서 맡도록 하는 ‘순환평가제’ 도입 등 핵심적인 내용은 검토 대상에서 모두 제외됐다. 공시 강화, 독자 신용등급 제도, 애널리스트 등록제 등 부수적인 사안에만 논의가 집중됐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평가사에 대한 규제 강화로 공정성과 객관성을 높이려 하고 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해 온 평가사를 견제할 필요성 때문이다. 국내 상황은 다르다. 수수료 수입을 쥐고 있는 기업에 신용평가사들이 휘둘리고 있다. 좋은 신용등급을 제시하는 평가사를 선택하는 ‘신용등급 쇼핑’이나 신용등급이 실제보다 부풀려지는 ‘신용등급 거품’ 등 국내 신용평가시장을 짓누르는 오명들은 대부분 이런 구조적인 문제와 직결돼 있다.

TF가 대부분 시간을 할애한 ‘독자 신용등급 제도’도 용두사미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신용등급 평가에서 모기업이나 그룹사의 지원 가능성을 배제하고 개별 회사의 상환능력을 보겠다는 게 제도의 취지다. 하지만 대상을 대기업 계열사로만 한정했다. 지방공기업과 금융회사는 제외했다. 채권발행 규모 등을 감안할 때 이들 기업을 제외한 독립신용등급제 도입은 절름발이에 그칠 것이란 평가가 많다.

이번 TF 작업에서 신용평가사는 배제됐다. 마지막 회의에만 참여했다는 후문이다. 시장상황을 반영한 개선방안 도출이 어려웠던 이유다. 신용평가는 자본시장 발전의 최대 인프라다. 이왕 논의를 시작한 만큼 신용평가시장의 새 판을 짜는 게 맞다. 생색내기나 구색 맞추기 제도 개선에만 그칠 경우 국내 신용평가시장의 선진화는 요원한 일이 되고 만다.

김은정 증권부 기자 ke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