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소백산 비로봉 07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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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발 헤치고 4시간 만에 오른 정상…준비한 사람만 희열 맛볼 수 있어
이창식 < 동아원 사장 rhecs@kodoco.com >
이창식 < 동아원 사장 rhecs@kodoco.com >
이번 야간 산행을 준비하면서 나는 이 밤이 결코 끝이 아님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이 밤을 거치지 않고는 일출의 경이롭고 아름다운 축복에 다다를 수 없다는 지혜를 얻을 수 있었으면 하는 강한 바람이 있었다. 지식은 들어 알 수 있으나 지혜는 스스로 행동하고 생각지 않으면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기에 잠깐의 지식보다는 영원한 힘을 주는 지혜를 얻고 싶다. 그리고 미리 준비하고 가 있지 않으면 깊은 산 정상의 일출은 볼 수 없을 것이며 새벽녘 소백산의 정기 가득한 일출은 땀 흘리고 달려온 이들의 몫임을 깨닫고 싶다.
소백산의 정기와 새벽녘 눈부시게 맑을 태양의 정령을 벗 삼아 나를 발견하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소백산으로 출발한다. 그러나 소백산은 쉽사리 나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듯 심통을 부린다. 주위에 눈바람이 날리고 어둠은 가득하다. 나는 홀로 걷는 것이 편안하다. 무시무종(無始無終), 시작도 끝도 없는 길을 가는 것이 인생이다. 그 길, 결국은 홀로 걸어가야 할 길이 아닌가? 휘날리는 눈바람을 헤치며, 위로 그리고 아래로 향한 지 4시간여, 드디어 비로봉이 보인다. 얼마나 고맙던지, 온 몸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었다. 이제야 목이 마르다는 생각이 든다. 눈에 들어온 눈을 한 움큼 쥐어서 목마름을 달래고 다시 마음의 평정을 찾는다.
소백산 비로봉 07시34분! 흑룡이 피어오름을 보다. 걱정했지만 큰 어려움 없이 흰 눈과 맑은 공기 둘러싸인 채 붉게 타오르는 그 용솟음의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등반 중에 만났던 날려갈 듯 불어대던 검은 산바람도, 모든 것을 하얗게 감춰버린 소백산 새벽 눈발도 나의 열정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속에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직 나를 찾아 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을 잘 보냈다. 이제 나는 산을 내려가야 한다. 올라갈 때 밟았던 똑같은 길을 되짚어 내려갈 것이다. 그러나 흑룡을 보았기에 분명 같은 길이었지만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 같다. 산, 그리고 흑룡의 용틀임 한 번 겪었다고 하여 삶의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산행의 경험이 진정한 깨달음이 될 때 삶의 호흡을 조절해 고통을 줄이는 능력이 조금씩 자라날 뿐이다. 숨결은 낮아지고 마침내 소백산 산행이 끝났다. 하지만 끝이면서도 끝이 아닌 듯한 이 기분은 바로 내가 앞으로 가야 할 머나먼 길들 때문이리라. 설이 지났다. 또다시, 출발이다!
이창식 < 동아원 사장 rhecs@kodoc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