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참여' 폐해 외면한 학생인권조례
뇌물 공여 혐의로 구속됐다가 벌금형으로 풀려나 업무에 복귀한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은 교육과학기술부의 재의 요구와 일반 국민, 학부모들의 우려를 무시하고 학생인권조례를 공포했다. 자유민주주의는 법치가 우선돼야 하며, 이 점에서 사법부의 판단이 존중돼야 한다고 볼 때 이번 1심 판결의 정당성 여부는 논의하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좌파 교육감들이 밀어붙이고자 하는 학생인권조례 이면에 깔린 의도와 폐해를 교육측면에서 지적하고자 한다.

문제의 핵심은 ‘참여’에 있다. 참여는 노무현 정권의 정치 아이콘으로 큰 힘을 발휘한 바 있다. 그러나 참여 아이콘은 그냥 정치적 수사에 그치지 않는다. 참여민주주의는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신좌파(New Left)’가 지향하는 정부형태다. 이 신판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를 모태로 한 인민민주주의가 진보사상과 결합해 변형된 것이다. 외형상 고대 아테네의 고전적 민주주의와 루소의 자연주의처럼 개인의 직접 참여를 강조하지만, 실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거나 사회체제 존속 상 불가능한 참여가 말 그대로 ‘참여정치’를 명분으로 지나치게 강조된다. 좌파 교육감의 학생인권조례에 담긴 참여는 바로 이에 근거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교육적 차원에서 이처럼 불가능한 참여를 조장하지 말고 소정의 룰을 지켜서 뭔가 성과를 가져오는 참여를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1970년대 우리 교육계에 도입된 발견학습의 폐해는 이해를 더하기 위해 좋은 예이다.

인지심리학 덕에 당시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 발견학습을 통해 우리 교육계가 한층 도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에 대한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발견학습을 통해 학생들이 ‘모든 것을 발견한다’는 그릇된 관념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발견학습이 소기의 성과를 이루려면 학생들을 ‘자연 상태’로 그냥 방치하거나 자의적인 판단을 내리도록 방임해선 안 된다. 오히려 학생들의 발견이 가능하도록 수업상황을 엄밀하게 설계해야 하는 등 교사들의 수고가 엄청나게 배가된다.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발견학습은 교육계에서 학생들의 ‘자발적 참여’로 둔갑하게 되는 폐단으로 이어졌다.

‘발견’은 ‘성취’를 전제하는 개념이어서 학생들의 자발적 참여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발견과 성취를 경험하게 하려면, 학습에 대한 열정을 갖게 하는 교사의 권위가 뒤따라야 한다. 좌파 교육감들이 내세우는 학생인권조례에 담긴 ‘참여’는 유독 ‘교사-학생’의 대칭성만을 강조한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를 대등하게 설정한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학교에서 성취해야 할 참여는 대부분 교사와 학생 간의 비대칭성을 통해 이뤄진다. 흔히 교사-학생 간 협동과 동등한 참여를 요구하는 교수-학습 과정을 줄탁동시(啄同時)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 말은 병아리가 세상에 나올 때 어미 닭과 병아리가 알을 쪼는 시점이 같다는 점을 가리키는 말이지, 어미 닭과 태어나지도 않은 병아리의 대등함을 강조하는 말이 결코 아니다. 어미 닭이 알을 쪼는 행위와 강도는 병아리의 그것과 결코 같지 않다.

이를 무시하면 병아리가 죽는다. 여기서 우리는 교사-학생의 대칭성, 즉 동등한 참여를 전제해선 안 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좌파 교육감들이 학생인권조례에서 내세우는 ‘참여’는 줄탁동시의 비대칭성을 묵살하는 격이다.

아무렇게나 쪼아대는 병아리처럼 참여 명분으로 학생들을 방기하는 것은 병아리의 생명을 위협하듯 당장은 보이지 않지만 종국에는 아이들에게 결정적인 해가 된다. 줄탁동시의 대칭성이 부당하듯이, 학생들의 무한 참여를 주장하는 것은 뇌물공여의 ‘선의’를 강변하는 것만큼 억측이다.

김정래 < 부산교대 교수·교육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