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가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얼마 전 닐 스티븐슨이 1992년에 쓴 소설 ‘스노우 크래쉬’를 어렵게 구했다. 절판된 상태여서 책을 구할 수 없었는데, 한 유명 중고서점에 부탁한 끝에 간신히 구했다. 서점에서 신주단지 대하듯 책을 모셔와 밤새 읽어 내려갔다.

소설은 마치 예언서에 필적할 정도로 현실세계를 실감나게 묘사했다. 20년 전에 쓴 소설 속에 인터넷, 컴퓨터, 광섬유, 멀티미디어, 가상현실 등 이 시대의 핵심 키워드가 모두 담겨져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예언자도 아니고….

지금은 진부한 개념이 됐지만, 인터넷상의 ‘아바타’라는 용어와 개념도 소설 속에 처음 언급됐다. 상용화된 인터넷 서비스 ‘세컨드 라이프’도 책에서 설계한 ‘메타버스’를 그대로 베껴 현실화한 것에 불과했다.

필자가 그렇게 애타게 ‘스노우 크래쉬’를 찾아 헤맨 사연은 이렇다. 평상시 공상과학(SF) 소설에 큰 관심이 없었던 필자는 이 책을 대학친구로부터 선물로 받았다. 언젠가 이사할 때 잃어버린 사실조차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지난해 동창회에서 책을 선물한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자신이 선물한 ‘스노우 크래쉬’의 안부를 물었다. 아마도 필자의 직장과 직위를 염두에 두고, 그 책을 선물로 준 자신에게 감사하라는 무언의 압력 같았다.

친구에게 얼버무린 후 집으로 돌아온 필자는 미안했다. 친구의 선물이 그렇게 의미 있는 것인지 잊고 아무렇게나 다뤘다는 사실 때문에, 또 20년 전의 그 소설이 오늘날 과학기술 분야와 인터넷 사업, 문학과 철학 분야까지 널리 인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사실 때문에…. 지금 그 책은 필자의 서재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놓여 있고, 시간이 나면 책에서 영감을 얻기도 한다.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놀랄 만한 예언서 같은 소설을 보고 있자니 문득 영화 ‘매트릭스’가 떠올랐다. 영화 ‘매트릭스’는 ‘스노우 크래쉬’와 정반대의 현상을 얘기하고 있다. 현실에 살며 일상과 비슷한 가상현실에 들어가 모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상현실이 현존하는 곳이며 현실은 따로 존재한다는 역발상이었다.

우리는 ‘매트릭스’와 ‘스노우 크래쉬’가 묘사한 사회에 교묘하게 살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인간들이 원하는 모습만으로 채워진 천국이나 파라다이스만은 아니다. 그것은 현대사회의 복잡한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가상공간 역시 현실에서와 같은 고통과 절망, 그리고 꿈과 희망이 공존하는 것이다. 그곳 역시 삶의 또 다른 장소이며, 무한 개척지이기도 하다.

경계 없는 사회, 사이버공간과 현실세계의 장벽 역시 마찬가지다. 두 세계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분리된 사회가 아니다. 더 이상 경계 없는 삶의 공간이 돼가고 있다. SF소설이나 영화처럼 현실에서 공간의 파괴는 이뤄졌다. 기회는 공평하고, 선택은 우리에게 주어졌다. 신세계를 찾아내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서종렬 < 한국인터넷진흥원장 simonsuh@kisa.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