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땅 끝 마을
멀지 않았다. 서울에서 한반도 최남단 땅끝까지 가는 데 걸린 시간은 5시간30분. 휴게소에 들렀는데도 반나절이 채 안 걸렸다. 전남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갈두(토말)마을. 북위 34도 17분 21초. 좌·우·앞 모두 바다뿐, 돌아서지 않으면 어디로도 갈 길 없는 이 땅 끄트머리다.

1530년(중종 25) 간행된 ‘신증(新增)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우리나라의 남쪽 기점이요(북은 함북 온성), 육당 최남선의 ‘조선상식 문답’에 나오는 삼천리 금수강산의 남쪽 출발점이다. 해남에서 서울까지 천리, 서울에서 함북 온성까지 이천리로 잡아 삼천리란 것이다.

땅끝 바닷가에 우뚝 솟은 봉우리는 갈두산 사자봉. 해안을 따라 산 중턱에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정상을 오가는 모노레일 정거장이 나오고, 그곳을 지나면 길은 둘로 갈라진다. 하나는 바다와 맞닿은 진짜 땅끝으로 이어지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사자봉 전망대로 가는 길이다.

영화 ‘타이타닉’을 연상시키는 뱃머리와 땅끝비가 있는, 이 땅 마지막 흙을 밟고 돌아서서 전망대에 오르면 백일도·보길도·모자섬 등 주변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답답하던 가슴은 확 트이고. 전망대 앞 봉수대엔 새끼줄을 둘러 신년을 맞아 소원을 적은 한지를 매달 수 있도록 해놨다.

종이인 만큼 비 오고 바람 불면 젖어 떨어지거나 흩날리리라. 그래도 연말연시 땅끝마을을 찾은 이들은 정성껏 소원을 적어 꼭꼭 묶었다. ‘가족 모두 건강하게 해주세요.’ ‘애들 아빠 승진하게 해주세요.’ ‘우리 딸 시험에 꼭 붙게 해주세요.’

넘어져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아픔보다 부끄러움이 더하다는 걸. 낭떠러지로 몰려보지 않은 사람 역시 모른다. 그 막막함과 참담함을. 앉은 채 얼굴을 들어 쳐다보지도 않는 자를 뒤로 하고 떠날 때 의, 심장이 으깨지는 것 같은 심정을. 낭떠러지에서 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떨어지거나 돌아서거나. 떨어지면 마지막이지만 돌아서면 새로운 인생의 출발이다.

아프리카 대륙 끝 희망봉(Cape of Good Hope)의 원래 이름은 폭풍봉(Cape of Storms)이었다.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발견했을 때 폭풍으로 인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497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이곳을 거쳐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자 포르투갈 왕 주앙 2세가 나서서 희망봉으로 개칭했다.

새해다. 삶의 끄트머리에 서 있다 싶은 이들, 허허벌판에 내동댕이쳐졌다 느끼는 이들 모두 돌아서보라. 돌아서는 순간 다시 시작이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