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 "예술가는 노마드…국적ㆍ혈통 자체가 예술"
"많은 예술가와 운동선수들이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예술하는 사람에게 국적이나 혈통을 묻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노마드(유목민)화되는 우리 시대 예술가의 정체성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

소설가 이문열 씨(63 · 사진)가 신작 장편 《리투아니아 여인》(민음사)을 펴냈다. 《불멸》 이후 1년9개월 만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한국인 아버지와 리투아니아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뮤지컬 음악감독 김혜련.뮤지컬 음악감독으로 성공한 박칼린 씨를 떠올리게 한다.

소설은 다국적 정체성을 지닌 혜련의 예술혼과 사랑,피와 땅의 경계를 넘나드는 유목민적 생애를 슬프고도 아름답게 그려냈다. 화자는 혜련보다 아홉 살 연상인 공연 연출가 '나'로 그녀와 운명 같은 만남과 헤어짐을 거듭한다. 어린 시절 부산에서 금발 소녀 혜련을 처음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던 '나'는 음악감독이 된 혜련과 재회한다. 이후 연출가와 음악감독으로 인연을 이어가며 혜련의 할머니 대부터 이어져온 이산(離散)의 역사,혜련의 갑작스러운 부상과 그보다 더 갑작스러운 몰락 등을 지켜본다.

이씨가 소설을 처음 구상한 것은 1993년 늦겨울 뉴욕의 한 호텔에서다. 자신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명성황후' 제작 준비 과정에서 떠난 뮤지컬 관람 여행 중 혜련의 모델 격인 인물을 만난 것.그녀가 들려준 유년 시절의 추억담과 리투아니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이모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소설화의 유혹을 느꼈다고 했다.

10여년이 지나 작품을 쓰기 시작한 지 오래지 않아 그녀가 갑자기 '문화적 아이콘'으로 떠오르면서 적지 않은 부담을 느끼기도 했다. 이씨는 "많은 부분 그녀의 추억과 경험을 참고했지만,소설적 갈등 구조를 이루는 부분은 모두가 창작"이라며 "소설과 실제 그녀의 삶이 혼동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 작품은 김삿갓의 삶을 다룬 《시인》처럼 그가 오랫동안 천착해온 주제인 예술가 소설이다. 피와 땅이 더 이상 개인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21세기 현실과 예술의 보편성,노마디즘에 대한 성찰을 이야기하고 있다. 소설 속 혜련의 말에 유목민적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의 정체성에 대한 답이 있다.

'피부색이나 혈통 또는 거주 지역이나 소속 집단을 기준으로 정체성을 따진다면 너무 편협하고 자의적이 되지 않겠어요? 저는 정체성이란 돌아보는 게 아니라 앞을 바라보는 개념이고,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아가기 위해서 가다듬어 보는 자기 파악의 노력이라고 봐요.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가늠하기 위해 떠나온 곳을 몇 걸음 돌아보는 정도의….'

작가는 "지난 10여년 동안 소설을 발표할 때마다 몇 줄 꺼내가지고 이슈화해 버리거나,소설은 어디 가버리고 없고 시비와 논쟁만 남아 다녔다"며 작품 외 이슈로 주목받은 데 대한 아쉬움도 드러냈다. 그는 "이번 소설은 예술가적 고민과 고뇌를 담아 무겁게 쓴 소설이 아니다"며 "격앙된 목소리 없이 잔잔하게 예술에 대해 쓴 소품"이라고 강조했다.

경기도 이천에서 후배 작가들을 위한 '부악문원'을 운영하며 지내온 그는 고향인 경북 영양에 지은 집에서 절반 정도의 시간을 보내는 방안을 생각 중이다.

다음 작품에 대해서는 "김유신을 다룬 역사물을 준비하고 있다"며 "1980년대를 정리하는 현대물과 병행해 시작하려 한다"고 덧붙였다.

양준영 기자 tetriu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