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바탕화면엔 산다라 박, 책상 위엔 '소시' 컬렉션…마이크 잡은 김부장도 "내가 제일 잘나가~♪"
올 여름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한 정보기술(IT) 업체의 사무실 풍경.김 대리는 심호흡을 하고 마우스에 지그시 손을 갖다댔다. 3분 후면 걸 그룹 '2NE1'의 콘서트 티켓 발매가 시작된다. 혹시라도 초기에 매진될까봐 발매 시작 시간 전에 예매 사이트에 접속한 것이다. 사내 2NE1 팬클럽 동료 2명의 표까지 끊어야 한다. 아침부터 부장에게 업무로 한소리 들었지만,2NE1 콘서트 생각에 이미 잊은 지 오래다. PC 바탕화면의 산다라 박이 그에게 "홧팅!"하며 섹시한 웃음을 던지는 것 같다.

주류 유통업체의 막내 박 주임.저녁에 시작된 부서 회식이 3차 노래방으로 이어졌다. 모두들 '막내'를 연호했고,박 주임은 마이크를 잡자마자 구성진 트로트 가락을 뽑아낸다. 분위기를 잡기 위해 트로트만한게 없고,부장의 눈높이도 고려해서다. 하지만 선배들이 호응하는 것 같지만,그리 흥겨워 보이지는 않는다. 노래를 끝마치자 선배들이 이번에는 '부장돌(부장과 아이돌의 합성어)'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지그시 앉아있던 부장이 벌떡 일어나 무대로 나서고 화면에는 빅뱅의 '하루하루' 타이틀이 뜬다. 강한 비트의 음악과 함께 부장의 안무와 랩이 거침없이 터져 나왔다. 박 주임의 입이 벌어졌다.

20대 직장 초년생은 물론 30,40대 중견 직장인들 사이에서도 '아이돌 광팬'들이 적잖다. 임원들도 자신이 좋아하는 걸그룹 멤버의 이름을 줄줄 꿰며 삼촌팬,오빠팬을 자처한다. 웬만한 아이돌 그룹 팬카페에는 '삼촌방','오빠방'이 따로 마련돼 있다. 한때 부장과 임원급에서는 H.O.T는 '핫'으로,god는 '갓'으로 부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심지어 S.E.S를 '세스'라고 부르는 만행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그러나 이제는 옛날 이야기일 뿐이다.

◆원더걸스 해바라기

올해 초 한 가전업체 홍보팀의 이모 사원은 걸그룹 소녀시대가 회사 광고모델로 발탁되자 날아갈 것만 같았다. 마케팅을 진행하면서 직접 접할 기회까지 얻게 되자 사내 질투를 한몸에 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피곤하기만 하다. 사내에서 광고 포스터 청탁이 물밀듯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소녀시대 팬클럽 회원인 입사 동기에서부터 소녀시대 광팬을 자처하는 임원까지 이씨를 어르고 달래며 포스터를 요청한다. 최근에는 친한 계열사 부장으로부터도 연락을 받았다. "조카가 부탁해서…"라는 궁색한 변명이 뒤따랐다. 실제로 소녀시대 광고 포스터는 인터넷상에서 수만원대에 거래되고 있을 정도로 '레어(rare) 아이템'이다. "'포스터 1장 주면 랍스타 사준다' '포스터 안 구해다주면 지옥 끝까지 쫓아오겠다'는 온갖 당근과 채찍에 오늘도 시달립니다. "

한 세제 생산업체 유 부장은 오늘도 부하직원과 식사하면서 썰렁한 유머를 던진다. "텔미랑 텔링이랑 비슷하잖아.안 그래?" 그는 사내에서 소문난 '원더걸스 해바라기'다. '텔미'가 울려퍼지던 해에 사내경연에서 뛰어난 스토리 '텔링'으로 우수직원 포상을 받아 해외여행을 다녀왔고,노바디가 한반도를 휩쓸 땐 부장으로 진급했다. 동기들로부터 "부장 진급자는 '노바디 벗 유'네"라는 부러움을 사면서.그는 '원더걸스가 대박 내면 나도 잘된다'는 징크스를 굳건히 믿고 있다. 음반,음원,휴대폰 벨소리를 모두 구입하고 팬카페에도 가입해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 수년 동안 원더걸스의 국내 활동이 뜸하자 유 부장도 실적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한동안 부원들 사이에 '소녀시대'는 금기어나 마찬가지였다. 최근 유 부장은 원더걸스가 국내 활동을 재개하자 다시 힘을 내기 시작했다. 벨소리도 이미 원더걸스의 컴백 작품인 G.N.O로 바꿨다.

◆소녀시대는 심리 치료사

새내기 여직원들이 노래방에서 포미닛이나 애프터스쿨 등 걸그룹의 노래를 부르면 부장급 아저씨들은 소위 '녹아난다. '그러나 이것도 잘 불렀을 때의 얘기다. 한 대기업 여직원 박 대리는 회식 2차 자리에서 카라의 '프리티걸' 노래를 불렀는데 생각보다 고음이 지속적으로 나왔다. 게다가 같이 간 부장이 카라 멤버인 한승연의 광팬이었다. 박 대리는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얼굴이 빨개진다. "음이탈을 하자 부장이 웃으면서 '한번만 더 카라 노래를 부르면 인사고과 C를 주겠다'고 하데요. 정말 반쯤 분노가 느껴졌어요. "

대기업 마케팅 부서 정 과장의 책상 위에는 18개의 비타500이 나란히 줄지어 서있다. 이 제품의 광고모델인 소녀시대 9명이 각각 병 라벨에 붙어 있는데,얼굴이 크게 나온 클로즈업 버전과 상반신샷 버전 등 두 개 버전의 풀 컬렉션이다. 편의점용과 약국용 버전이 따로 있어 편의점용은 오다가다 사모으고,약국용 버전은 시중에서 찾기 힘들어 인터넷 쇼핑몰에서 구입했다. 정 과장에게 소녀시대는 심리 치료사이기도 하다. "상사에게 한번 깨졌을 때 하늘 한번 바라보고 심호흡을 한 뒤 소녀시대의 얼굴을 보면 가슴이 정화됩니다. "

◆샤이니가 구한 내딸

"티아라는 내가 발굴했다니까. " 아이돌 박사를 자청하는 한 시중은행의 김 과장은 이미 알려진 아이돌보다는 신인 그룹을 주목해 그들이 성장해 가는 데 굉장한 뿌듯함을 느낀다. 김 과장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례는 '티아라'다. '뽀삐뽀삐'로 전성기를 구가하기 전 '거짓말'을 통한 데뷔 무대를 지켜보고 팬을 자처했다. 초기부터 눈여겨 보던 아이돌이 대중의 사랑을 얻자 뿌듯한 마음에 한동안은 뽀삐뽀삐의 무대소품인 곰발바닥을 영업용 가방에 달고 다녔다.

인터넷 정보제공업체의 김 이사는 언제부턴가 보이그룹 샤이니의 링딩동을 흥얼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샤이니에 빠져 있는 딸에게 '전염'된 모양이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시덥지 않은 노래냐"며 하찮게 여겼던 그는 딸과의 대화를 위한 수단으로 샤이니 탐구에 나섰다. 노래가 귀에 익다보니 제법 흥겹게 느껴졌다. 샤이니가 최근 한류스타로 부상하는 것을 보니 반갑기도 하다. "딸에게 '연말 시험성적이 좋으면 샤이니 콘서트 때 친구들 표까지 같이 예매해 주마'고 했더니 얼굴이 확 피네요. 인터넷에서 소녀팬들과 티켓 경쟁을 할 게 걱정이기도 하지만,요즘 '열공' 중인 딸을 보면 흐뭇한 마음도 듭니다. "

고경봉/윤성민/강유현/강영연 기자 kg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