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부회장 직에서 내려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웨이터가 됐다. 오래 전부터 꼭 한 번 해보고 싶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처음에는 어색하고 힘들었다. 우선 하루 종일 서 있는 것이 감당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먼저 일에 애정을 쏟으니 결국 일도 나에게 보상을 해주기 시작했다. 나에게 접대를 받으려는 손님이 늘었으며 나로 인해 레스토랑 전체 매상도 증가했다. 레스토랑 밖에서도 항상 명함을 가지고 다니며 나와 레스토랑을 홍보했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다. 그저 일이 재미있고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가장 인기 있는 웨이터 중 한 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

환갑을 넘긴 나이에 호텔 레스토랑의 웨이터가 된 대기업 부회장,서상록 씨의 이야기다. 그는 인생에세이 《미쳐야 청춘이다》에서 "내가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한다고 그것을 부끄러워했다면,아마 나는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일을 사랑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미쳐야 한다. 하고 싶은 일이 떠오르지 않는다면,지금 하고 있는 일에 미쳐야 한다. 이 단순한 법칙을 실행한다면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1937년 경북 경산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정규 중 ·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했으나 고려대 정외과에 입학했다. 운영하던 회사가 어려워져 빚잔치를 하고는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서 열린 벼룩시장의 가장 구석에 자리를 조금 얻어 장사를 해보려는 데 눈길을 끌 수 없었다. 그때 생각난 것이 약장수와 각설이.어릴 때 동네에 약장수들이 오면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유창하지도 않은 영어로 '헬로,헬로,아메리칸 헬로,치프 치프,바이 바이'를 외치며 앞뒤 가리지 않고 각설이처럼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다. 처음에는 부끄러웠지만 어느새 사람들이 모여들어 북새통을 이뤘다. "

그는 그렇게 번 돈으로 부동산 회사를 세워 재력가로 성장했다. 삼미그룹 부회장으로 발탁돼 한국으로 돌아왔으나 1997년 삼미그룹이 부도를 내자 경영인으로서의 책임감을 느껴 사표를 냈고 얼마 후 웨이터로 변신했다.

그는 "빌딩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낮아졌고,도구들은 날카롭고 세밀해졌지만 친절함은 더 무뎌졌다. 집은 더 커졌지만 행복은 줄어들었고,생활은 더 편리해 졌지만 여유로운 시간은 줄어들었다"며 "아름다운 경치를 보려면 새로운 곳으로 눈을 돌릴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선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900번이 넘는 도전 끝에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한 차차순 할머니,81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103세 때 '미국의 샤갈'로 칭송받은 해리 리버만,수차례 사업에 실패하고 의원 선거에서 낙선했던 링컨 대통령 등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꿈을 이룬 사람들도 소개한다.

그는 "나이는 숫자일 뿐이다. 세월이 사람을 늙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사람을 늙게 한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올리는 인디언처럼 꿈이 이뤄질 때까지 한번만 미쳐보자"고 강조한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