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는 결국 사람 장사…제대로 한 번 해봐야죠"
임기영 대우증권 사장과 마주앉으면 증권사 최고경영자(CEO)가 아닌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를 만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인상부터가 그렇다. 알고 보면 의외로 다정다감한 남자라는 게 임직원들의 평가지만,낯선 사람들에겐 무뚝뚝하다는 인상도 풍긴다. 질문을 받으면 고작 한두 마디로 답할 때가 많다.

행동은 다르다. 적은 말수만큼이나 한번 결정한 일은 우직하게 밀고 나간다. '혁신의 전도사'라는 별명도 그래서 붙었다. 2009년 6월 사장에 취임한 뒤 대우증권을 근본부터 바꿔놨다. 금융상품 트레이딩과 인수 · 합병,기업공개 등 IB(투자은행) 분야를 대폭 강화해 2008 회계연도 2038억원이던 영업이익을 2009년 업계 최대인 4120억원으로 늘렸다. 모든 직원이 연중 5일 이상 휴가를 쓰도록 강제한 '휴가 의무사용제',금요일 오후 5시면 무조건 퇴근해 가족과 보내도록 한 '패밀리 데이' 등도 도입해 직장문화도 바꿨다.

올해부터는 대우증권의 최대 강점으로 꼽혔던 주식 브로커리지를 축소하고 자산관리를 강화하는 리테일 혁신에 나섰다. 대부분 임원과 컨설팅 업체마저 "단기적으로 이익이 줄어들 수 있다. 오너가 아닌 전문경영인이 추진할 사안이 아니다"며 반대했다. 임 사장은 그러나 "길게 보면 직원과 고객 모두를 위해 꼭 가야 할 길"이라며 밀고 나가고 있다는 게 직원들의 전언이다.

말보다 행동을 앞세우는 그의 성격 때문일까. 그가 단골집이라고 추천한 곳은 담백함이 돋보이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베니니'였다. 한낮의 가을 햇살이 유난히 따사로웠던 지난 11일.서울 신문로에 위치한 '베니니'에서 그가 추천한 코스 요리를 함께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달짝지근하면서도 쌉쌀한 솔잎 주스가 나왔다. 임 사장은 "소화에 도움이 돼 주방장이 항상 내놓는 애피타이저"라고 소개했다. 이 집을 단골로 삼게 된 이유를 물었더니 "싱싱한 식재료가 맘에 듭니다. 중식 양식 일식 다 잘 먹는데 언제부터인가 소스보다는 식재료의 질이 중요하게 느껴지더라고요"라고 답했다.

임 사장은 국내 IB 분야 1세대다. 불모지나 다름없던 국내 IB 분야를 이끌어온 주역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주문한 포도주와 함께 첫 요리로 멍게 카르파치오가 나왔다. 싱싱한 멍게의 향기가 입맛을 돋웠다.

▼금융업을 직업으로 선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경제학을 전공해서 그런지 국제금융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장기신용은행에 들어갔죠.월드뱅크가 한국에 지원한 장기개발자금을 국내 기업들에 대출해주는 심사역으로 시작했어요. "

▼외국계로 옮긴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뱅커스트러스트은행에서 근무하던 한 지인이 놀러 오라고 해서 갔는데,그게 면접이었더라고요. 그래서 옮겼는데,그때부터 줄곧 IB 업무를 했죠."

어떻게 보면 우연하게 시작한 IB 업무다. 하지만 IB에 대한 그의 애착은 대단하다. 성과도 빼어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업무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국가적 차원에서는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한국이 40억달러의 외평채를 발행할 때 초기 작업에 관여했던 게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가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데 약간이나마 일조했다고 자평합니다. " 한푼의 달러라도 구하기 위해 발버둥칠 때 외평채를 조달하는 데 기여했다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보람있었던 일은 무엇이죠.

"1990년대 중반 한국전력이 만기 100년짜리 2억달러 해외 채권을 발행했습니다. 제가 한전과 정부를 설득해서 한 것입니다. 한국 신용등급이 좋다는 걸 입증해 보이려고요. 미국을 제외하면 아시아는 물론 유럽 국가 중에서도 처음 선보인 센추리(century) 채권이었죠.1999년 강원랜드가 1850억원 규모 유상증자 할 때 주선한 것도 보람이었죠.삼성증권 IB본부장할 때였는데,강원랜드는 그 돈으로 지금의 카지노 건물도 지을 수 있었고 나중에 상장도 했어요. 둘 다 남들이 다 안 된다고 했던 건데 제가 고집해 성취한 거죠."

그가 먼저 '삼성증권'을 거론하자 화제는 자연스럽게 박준현 삼성증권 사장으로 넘어갔다. 임 사장과 박 사장은 인천 제물포고 동기동창이다. 고 2 · 3학년 때 같은 반에서 앞뒤 자리에 앉았을 정도로 친하다. 절친이 국내 1,2위 증권사 CEO로 만나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것도 일종의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삼성증권 박 사장과 함께한 학창시절 추억은 어떻습니까.

"독일어,수학 과외를 같이 받은 정도죠.그 외 추억은 별로 없어요. 둘 다 미팅도,여행도 안했고 공부만 했어요. 박 사장은 아이큐(IQ)가 160이 넘어요. 아주 공부를 잘했어요. "

▼1998년 삼성증권으로 옮긴 것도 박 사장 권유 때문이었나요.

"당시 황영기 삼성그룹 금융전략실장(현 차바이오앤디오스텍 회장)과 그 밑의 총괄임원이던 박 사장이 나를 좀 보잡디다. 황 회장도 뱅커스트러스트에서 같이 근무해 잘 알던 사이였죠.두 사람이 아시아 제1의 증권사를 만들어보자며 같이 일하자고 꼬드겨서 넘어갔죠."

꼬임에 빠졌든,뜻한 바가 있었든 삼성증권에서 일했으면 많은 돈을 벌었을 법했다. 이번에도 그의 대답은 단답식이다. "아닙니다. " "왜 아니냐"고 다시 한번 물을 수밖에 없었다. "계약직 임원으로 갔으면 그랬겠죠.근데 경영 임원으로 갔어요. 황 회장이 돈이 뭐가 중요하냐,나중에 큰 일 하려면 계약직 임원은 안 된다고 조언합디다. 저도 삼성증권 사장 한번 해 볼까 해서 그러자고 했는데,결국 사장도 못하고 돈도 못벌었죠.허허허."

다음 요리로 감자말이 새우구이가 나왔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새우 고유의 맛을 제대로 살려냈다. 포도주 한모금과 어우러진 맛이 그만이다. 이때쯤 대우증권의 경영 얘기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우증권은 1조1000억원 안팎의 대규모 증자를 추진하고 있다. 규모가 3000억~4000억원에 머물 것이라는 시장의 예상을 깬 것이었다. 증자 규모가 지나치게 커 새 수익원을 찾지 못하면 이익률이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왔고 증자 발표 후 주가도 크게 떨어졌다.

▼증자 규모가 예상보다 커서 다들 놀랐는데요.

"회사 덩치를 키우려면 돈이 많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규모가 작으면 해외에서 IB 사업을 할 수 없어요. 하다못해 아파트 급매물을 살 때도 주머니에 돈을 갖고 있어야 곧바로 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국내외 시장에서 좋은 물건과 기회를 노려볼 생각입니다. "

좋은 물건을 노린다면 뭔가 염두에 둔 물건이 있을 듯했다. 임 사장은 "이것저것 보고는 있는데 결정된 것은 아직 없다"고 부인했다. 다만 "증자를 끝내면 그 돈으로 국내외에서 좋은 사람부터 대거 뽑을 생각"이라고 했다. "IB는 사람 장사이며 훌륭한 사람이 있어야 글로벌 네트워크도 생긴다"는 철학에서다. 인재도 확보하고 해외 법인도 늘린다면,뭔가 대단한 밑그림이 있을 것 같다.

"주식형 상품 장기 적립투자가 최고의 재테크죠"

▶홍콩법인에 1억달러를 추가 증자키로 결정했는데요. 지난달엔 베이징에 투자자문사도 설립했고요. 해외 진출을 강화하고 있는 게 맞지요.

"이미 국내 증권업계는 수수료 경쟁으로 레드오션이 됐어요. 해외시장 진출은 선택이 아닌 필수죠.지금 상태에서 안주하는 것이야말로 국내 증권업계의 가장 큰 리스크입니다. 변해야 삽니다. "

이제는 좀 쉬어 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 사장이 열변을 토하고 있는 사이 메인 요리인 스톤 그릴 안심 스테이크가 나왔다. 적당히 달궈진 돌 위에 놓인 먹음직한 안심 스테이크가 식욕을 당겼다. 임 사장 자리 앞에는 아직 조갯살 파스타 접시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곳의 스테이크는 화덕에서 약간만 굽고 달궈진 돌에 고기를 올려 서서히 익혀 먹는 게 특징이다. 포도주 건배를 청하면서 가벼운 질문을 했다.

▶취미는 무엇인가요.

"아내와 함께 주말에 영화도 보고 음악회도 자주 가려고 합니다. 영화 '최종병기 활'은 개봉 1주일 뒤 보고 이건 관객 700만명 이상 들 거라고 주변에 얘기했는데,내 말대로 됐죠.주인공이 숲에서 도망가는 장면은 람보 1편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했고요. "

▶예술적 기질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전혀 아닙니다. 대학을 같이 다닌 배창호 영화감독,구본창 사진작가 등 예술가 몇몇이랑 친한 정도가 다예요. "

▶대중음악도 즐겨 듣고 부르신다고 들었습니다만.

"부활이란 그룹의 '생각이 나'란 노래를 좋아해요. 이승철 씨 노래도 다 좋아하고요. 따라 부르기 편해서요. 스마트폰에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다운받아 듣곤 합니다. "

영화도 보고 젊은사람 음악도 들을 정도면 임 사장은 아직도 청춘이다. 더욱이 부인과 같이 영화를 본다면 금실도 대단할 것 같았다. 그래서 넘겨짚어 보았다. "연애결혼하셨죠?" "아니,중매입니다. " 그걸로 끝이다. 참 재미없는 사람이다. 그래도 물어볼 건 물어봐야 했다. "프러포즈는 어떻게 하셨나요?" "만난 지 두 달 만에 용인자연농원(현 에버랜드) 호숫가를 걷다가 불쑥 프러포즈를 했는데 선뜻 승낙하더라고요. 하하하."

임 사장은 디저트로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평상시엔 잘 마시지 않지만 오늘은 인터뷰로 긴장이 돼 커피 한잔 해야겠다"는 농담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대우증권은 그가 네 번째로 CEO를 맡은 회사다. 임 사장은 "마흔두 살 때 CEO가 되자 아내가 너무 일찍 잘나가면 빨리 그만두는 거 아니냐고 걱정했다"고 소개했다.

증권사 CEO인 만큼 "글로벌 금융시장 불안은 언제쯤 해소될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임 사장은 "2008년엔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지 않을 거라고 공언하고 다녔는데 얼마 뒤 파산을 해버려 망신을 산 적이 있다"는 말로 대신했다. 유럽 위기가 쉽게 해결될 사안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일반인에게 추천하는 재테크 방법은 무엇일까. "30년 경험을 돌아볼 때 주식형상품에 장기간 적립투자하는 게 가장 수익률이 좋은 것 같습니다. " 길게 보고 투자하라는 모범답안이 돌아왔다.

자리를 파할 시간이 왔다. 헤어지며 악수를 할 때 "증권인으로 30년간 살아온 삶에 만족하십니까"라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인터뷰 내내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간결했다. "다시 태어나도 당연히 증권맨이 될 겁니다. 돌이켜보면 힘도 들었지만 역동적인 매력이 있었습니다. "

임기영 사장의 단골집 '베니니'

"IB는 결국 사람 장사…제대로 한 번 해봐야죠"
伊 토스카나식 요리…스테이크는 달군 돌 위에 올려져 나와


서울 신문로2가 가든플레이스 내에 위치한 '베니니(Benigni)'는 이탈리아 중부지방인 토스카나식 요리를 주로 하고 있다. 토스카나식 요리는 강한 소스보다는 육류 콩 보리 등 원재료의 맛을 최대한 살린 건강식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대표 토스카나식 스테이크인 '탈리아타 디 만조'가 유명하다. 국내 한우 중 3% 안에 드는 최상급 고기만 사용해 만든다. 해외에서 가져온 화덕 그릴에서 굽는다. 스테이크는 접시가 아닌 달군 스톤(돌) 위에 올려져 손님에게 나온다. 안심 스테이크 4만5000원,등심 스테이크는 4만9000원이다. 티본 스테이크는 9만원이다.

"IB는 결국 사람 장사…제대로 한 번 해봐야죠"
직접 만든 생면을 이용한 파스타 요리도 즐길 수 있다. 가격은 품목별로 1만9000~2만3000원대다. 코스 요리는 점심 4가지(2만5000~6만5000원),저녁 3가지(4만7000~7만5000원)가 있다. 레스토랑 이름은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감독 로베르토 베니니에서 따왔다고 한다. (02)3210-3351~2

>> 임기영 대우증권 사장

▶1953년 인천 출생 ▶제물포고,연세대 경제학과 ▶미국 조지워싱턴대 MBA ▶뱅커스트러스트은행 서울기업금융책임자 부지점장 ▶살로몬브러더스 한국사무소장 겸 한국대표 ▶한누리살로몬증권 공동대표 ▶삼성증권 IB사업본부장 ▶도이치증권 한국 부회장 ▶IBK투자증권 사장

이상열/김은정 기자 mustaf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