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위기ㆍ인플레ㆍ분열…떠나는 트리셰, 어두운 유로존
6일 독일 베를린 유럽중앙은행(ECB)통화정책회의.매달 열리는 정책회의를 마친 뒤 장클로드 트리셰 ECB 총재가 기자회견장에 들어서자 카메라 세례가 쏟아졌다. 지난 8년간 유럽 통화정책을 좌우했던 트리셰 총재는 이날 마지막 회의를 주재했다. 그러나 역사적 순간을 음미하기엔 상황이 너무 촉박했다. '물가안정'에 무게를 둬왔던 트리셰 총재가 돈을 풀기로 했다는 발표를 한 것은 몇 달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하필 지난달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물가는 37개월 만에 최고치로 치솟았다. 트리셰 총재가 마지막날까지 얼마나 어려운 판단을 요구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에 대한 유럽의 목소리는 둘로 갈렸다. 그리스 등 남유럽 대표는 "함께 죽지 않으려는 결정"이라며 옹호했다. 반면 독일 등에서 파견한 이사들은 "성급히 돈을 풀었다가는 문제만 키운다"며 맞섰다. 트리셰 총재는 "지난 8년과 마찬가지로 이번 항해(회의)도 순탄치 않았다"고 이날 회의 분위기를 전했다. 고심 끝에 트리셰 총재가 내놓은 마지막 해법은 금리를 동결하되 ECB가 400억유로 규모 돈을 푼다는 일종의 '중간길'이었다.

트리셰 총재는 이달 말로 8년 임기를 마친다. 다음달부턴 마리오 드라기 이탈리아 중앙은행 총재가 신임 ECB 총재로 재정위기 대응의 지휘봉을 넘겨받는다. 트리셰 총재는 지난 23개월간 계속된 유럽 재정위기의 '소방청장' 역할을 떠맡아왔다. 유럽 경제의 '엔진' 독일과 유로존의 '운전사'를 자임해온 프랑스,글로벌 '최종 대부자' 국제통화기금(IMF)이 모두 선뜻 리더 역을 맡길 주저할 때 유로존 위기 대응을 주도해왔다. ECB의 재정위기 국가 국채 매입 결정과 그리스 구제금융 결정,유럽재정안정기금(EFSF) 조성 등이 모두 트리셰 주도하에 이뤄졌다.

스페인 일간 엘파스는 "재정위기 파국 속에서도 유럽이 깨지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그의 균형 잡기 덕분이었다"고 호평했다.

그가 마지막 회의에서 내린 결정도 이 같은 트리셰의 '균형감'이 두드러졌다. 추가로 금리를 내릴 여지를 후임자에게 남겨주면서도 돈을 풀어 경기부양 요구를 충족시켰다. 트리셰 총재는 기자회견에서 "ECB는 금융리스크가 커지는 정책에는 언제나 신중한 행보를 보여왔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트리셰의 마지막 카드가 '솔로몬의 해법'이 될지 유효기간이 짧은 '진통제'에 불과할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재정위기와의 전쟁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에 전쟁을 이끌 장수가 교체되기 때문이다. 드라기 차기 총재의 지도력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상태다.

유럽의 분열상도 문제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이 "현재 유럽 위기는 전적으로 남 · 북유럽 간 균열의 문제"라고 단언했을 정도다. 특히 독일과 프랑스 간 불협화음이 거세지는 게 걱정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연일 "2008년 금융위기 때처럼 독일 은행권에 공적자금을 투입해서라도 은행 자본을 확충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반면 프랑스는 자국 은행들이 거액의 유로존 변방국 채권에 물린 상황에서 '프랑스 은행권에 대규모 자본확충이 필요하다'는 진단이 나올 경우 자칫 위기가 급격히 심화되고 'AAA' 국가신용등급이 강등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트리셰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물론,유럽의 운명이 결국 재정위기 대응 최고사령탑이 물러난 뒤에 결정나게 됐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