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사랑은 혁명이다. 쿠데타다. 열병이고 존재를 뒤흔든다. 사랑이란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상처를 치유하는 것도 사랑이란 묘약이다. " 한 중견 여류작가의 신작소설에 나오는 말이다.

9월이다. 부쩍 높아진 하늘에 뭉글뭉글 뭉쳐진 구름이 굳이 남산 골짜기까지 찾지 않아도 가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린다. 이때 쯤이면 우리의 젊은 숙녀들은 때로는 도도한 황후의 모습으로,때로는 죽음 같은 고독을 등 뒤에 감춘 채 짙은 와인색 드레스로 성장(盛裝)한 집시 여인으로의 변신을 꿈꾼다.

청년들도 뒤질 순 없다. 지리멸렬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음모하며,낭만적이되 다소 외로운 모습의 독학자(獨學者)로 꾸미고서 길고 긴 방황을 예비한다. 나는 이 젊은이들을 약간의 부러움과 시기심 섞인 박수로 찬미하고,그들의 변신이 이 가을에 더욱 빛날 것을 축도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쉽게 그들의 변신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다 보니 친구나 주변 사람들의 자녀 결혼 소식을 자주 들으면서 참으로 서글픈 현실을 목도하곤 한다. 상대방의 말 한마디,손 동작 하나에도 가슴 설레며 끝 모르게 질주하는 사랑의 감정으로 충만해 있어야 할 젊은이들이 고작 상대의 재력이나 조건을 따지는 '결혼시장'에 저급한 매물로 나와 있는 게 그것이다. 그 같은 모습은 순결한 사랑을 모욕하고,우리를 절망케 한다.

영혼으로부터의 사랑,그리고 그 사랑의 완성이고 축복인 성스런 결합은 진정 이 시대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그 같은 바람은 아직도 인생을 제대로 모르는 나같은 철없는 자의 독백일까?

30년도 훨씬 전,초급장교로 지방에서 복무할 때 여러 동기생들이 갓 결혼해 아리따운 각시들과 시골의 납작한 월셋방에 나붓이 깃들어 살았다. 당시 공군 소위 월급이래봤자 단돈 5만여원.그때도 신접살림하기엔 턱없이 적은 액수였지만 우리는 행복했다. 생활에 힘겨워도 자신의 일생을 바칠 사랑하는 여인이 곁에 있어 행복에 겨워하던 친구들.이제 그들도 나이가 들어 제 자식들 결혼을 걱정하며 그 시절을 회상하며 웃곤 한다.

이 계절에 나는 감히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영국 왕실에서 있었다는 세기의 사랑은 아니더라도 자신만의 일생을 가르는 오롯한 사랑을 키워보라고.때로 그 사랑의 예리한 칼날이 자신을 베어 깊은 상처를 입히더라도 그 상처를 치유하는 것 역시 사랑이란 묘약이라 하지 않던가?

나이 든 사람들도 젊은 시절 누구나 한번쯤 경험하고 남모르게 간직하고 있을 치명적 사랑의 추억들을 이 계절에 다시 한번 꺼내 들여다보면 어떨까? 비록 퇴색했을지라도 과거의 그 열정과 아렸던 상처의 자국을 되새겨본다면 이 남루하고 핍진한 세상에서 잠시나마 청량감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인생에서 사랑이란 이름의 찬란한 혁명을 꿈꾸기에 이 가을은 너무 잘 어울리면서도 가슴 싸한 계절이 아닌가.

한지훈 < 이노패스인터내셔널 대표 jhhan@innopathint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