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복지이념' 이제 눈을 떠 직시해야
수명은 늘어나는데 세상은 점점 더 위험한 곳으로 변해간다. 불확실성을 본질로 하는 미래가 더 길어지고 세상살이에서 생기는 위험이 커져만 간다. 헤지(위험 대비)를 해야 한다. 우선 보험이 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1600)에 보면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상인인 안토니오가 배가 난파할 위험을 헤지하기 위해 보험에 들었다는 이야기가 없다. 보험만 들었어도 악덕 고리대금업자인 샤일록에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 노련한 상인인 안토니오가 보험에 들지 않았을까. 셰익스피어가 보험을 몰랐기 때문이다. 보험은 1350년대에 이미 출현했지만 보험이 산업으로 태동하기 시작한 것은 1666년 런던 대화재 이후다.

미국 하버드대의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 교수는 보험이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1660년께 파스칼과 페르마의 확률이론 및 사회통계학자들에 의해 인간의 평균수명에 대한 연구가 나타난 이후라고 말해준다. 수학자들이 지적(知的)인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이를 바탕으로 1744년에 교회 목사가 사망할 경우 그 부인과 자녀들이 가난에 시달려야 하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정교한 계산에 의한 기금 마련 장치가 스코틀랜드에서 고안됐다. 영국은 보험 가입률이 가장 높은 나라다.

보험에 들 수 없는 빈곤층은 어떻게 할까. 여기서 영국이 원조(元祖)로 알려져 있는 복지국가 이념이 나온다. 그런데 사실은 독일이 영국에 한 20년 앞섰다.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이미 1880년에 '노령연금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보다 훨씬 다루기가 쉽다'라든가 '일반 국민이 무산자(無産者)를 책임지고 지원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이 이치(理致)를 포용하는 자가 권력을 잡는다'고 했다.

우리 정치인들이 비스마르크의 가르침을 받았는지 아니면 정치인의 본능으로 이 점을 알아차렸는지는 모르겠으나 비스마르크의 말이 국내에서 실현되고 있다. 복지국가 개념은 사회주의나 자유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좌파가 만든 것도 아니다. 보수정당이 복지 논쟁에서 공연히 어색해 할 필요가 없다. 복지국가 개념은 공동체 내에 보험에 가입할 수 없는 극단적으로 희망이 없는 무산자가 있게 해서는 안 된다는,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정치인들의 정치적 목표 추구가 결합돼 탄생한 것이다.

그 후 세계는 양차 대전을 겪었고 복지국가 개념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됐다. 무산자를 구휼(救恤)한다는 차원에서 국가가 모든 것을 책임진다는 만능보험 차원으로 변화가 일어났다. 특히 일본은 이상적인 복지국가의 상징이 됐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복지국가는 인간의 본성과 관련이 있는 '노력과 보상,기여와 혜택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세계적인 스태그플레이션이 뒤따랐다. 복지국가는 해체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불행하게도 현재 세계 각국은 재정위기를 맞고 있다. 복지 문제는 이제 인류가 당면한 가장 해결이 어려운 문제들 중 하나다. 재정문제와 정치적 대립 때문에 국내에서는 '복지포퓰리즘'이라는 말이 부정적인 느낌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선거쟁점이다.

그러나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무력한 이웃에 대한 최소한의 측은지심을 버릴 필요는 없다. 노력과 보상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지 않으면 그에 필요한 재원(財源)을 마련할 수 있다. 민간이 할 수 없는 영역에서 국가가 시행하는 보험은 국가적 차원의 규모의 경제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보통사람들은 어떻게 할까. 국가에 의존할 생각을 줄이고 보험을 찾는 것이 현명하다고 역사는 가르쳐 준다. 그리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든든한 위험 헤징 수단은 근검 절약하는 생활 습관과 저축이다. 국가도 같다. 재정위기가 아니더라도 정부부터 근검 절약하는 것이 복지국가를 만드는 첫걸음이다.

김화진 < 서울대 법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