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에 있는 무림P&P에 들어서면 거대한 기계가 사람을 압도한다. 길이가 600여m에 이른다. 최근 완공된 국내 최초의 펄프 · 종이 일관화생산공장이다. 이 설비의 특징은 소음이 적다는 점이다. 제지공장은 수천개 모터 소음 때문에 아주 시끄럽다. 그런데 이 공장에선 옆사람과 대화할 수 있을 정도다. 핵심 설비인 초지기는 독일 보이스사 제품이다. 김인중 무림P&P 대표는 "역시 기계는 독일"이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기계가 부드럽게 움직이는 데다 생산수율이 생각보다 훨씬 빨리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반월공단의 크로바케미칼은 염산 황산 등 위험물을 담는 정밀화학용기업체다. 아시아 시장점유율이 무려 50%에 이른다. 10%에 불과한 일본을 압도한다. 이 회사 창업자인 강선중 크로바케미칼 회장은 창업초기 '극일(克日)'을 목표로 세웠고 결국 이를 달성했다. 여기엔 크로바케미칼의 눈물나는 노력이 밑거름이 됐지만 이 분야에서 11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독일 마우저와의 기술제휴가 큰 힘이 됐다.

요즘 유럽이 시끄럽다. 몇몇 나라의 디폴트 가능성마저 거론된다. 그럴수록 돋보이는 나라가 독일이다. 독일은 작년 1조2060억달러 수출에 1517억달러의 무역흑자(IMF 통계)를 기록했다. 이웃나라 프랑스가 5100억달러 수출에 845억달러 적자,영국이 3735억달러 수출에 1642억달러 적자,이탈리아가 4408억달러 수출에 347억달러 적자를 각각 기록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독일이 강한 것은 제조업 중심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메르세데스 벤츠,BMW,폭스바겐,보쉬,지멘스,바이엘,칼자이스,하이델베르크 등 기라성 같은 업체들이 버티고 있다. 더욱 강한 것은 중견 · 중소기업이다. 보이스와 마우저,가구업체인 파셴,쌍둥이칼을 만드는 헨켈스 같은 업체들이다.

이들의 힘은 오랜 역사를 통해 이뤄온 기술개발과 마이스터에 의한 철저한 품질관리에서 나온다. 광학 분야의 전설 칼자이스는 1846년,인쇄기계의 최고봉 하이델베르크는 1850년,바티칸의 서재를 꾸민 파셴은 1883년 창업해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공장 안에는 마이스터들이 자리잡고 있다.

수십년 동안 인쇄업계에 종사해온 국내의 한 기업인은 "독일 기계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예술품"이라며 "그러다보니 바이어가 갑이 아니라 독일기업이 슈퍼갑이며 이는 중견 · 중소기업들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요즘 한국기업의 독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독일과 협력해야 제조업 정상에 올라설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독일 역시 한국과의 협력을 원하는 경우가 많다. 응용제품 개발능력이 뛰어나고 부품도 잘 만들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이 세계 무대에서 슈퍼갑으로 도약하기 위해선 독일과의 제휴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국내에는 독일에 대한 자료가 빈약하다는 점이다. 대형서점에 가도 마이스터에 관한 단행본조차 찾아볼 수 없다. 독일 기업에 대한 정보는 말할 것도 없다.

이제부터라도 독일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와 정보 축적이 필요하다. 산업 및 중소기업 정책,마이스터제를 통한 학력 인플레 해소방안 등 배울 게 많기 때문이다. '정신의 공화국 하이델베르크'의 저자 김덕영 박사(독일 괴팅겐대 사회학)가 지적한 '나눔의 문화' 역시 우리가 공유해야 할 중요한 덕목이라고 확신한다.

김낙훈 中企 전문기자 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