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복도에서 마주친 조선족 보모,지하철에서 예수를 믿느냐고 묻는 전도사,기다려봐도 도통 회복되지 않는 차이나펀드 수익률,끊임없이 휴대폰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스팸문자와 음성 서비스….

일상은 그대로 시(詩)가 된다. 다만 평범한 삶 속에서 성찰과 사유를 끄집어내는 시상(詩想)의 깊이만큼은 온전히 시인의 몫이다. 중견 시인 유자효 씨(64 · 사진)가 12번째 시집 《주머니 속의 여자》(시학)를 펴냈다. 전업 시인으로 시에 전념한 지 몇 년,차곡차곡 쌓아온 80편의 서정시가 도톰하다.

'불 꺼진 아파트 복도에서/아기를 앞으로 옮겨 안은/여윈 조선족 아주머니의 통화 내용//"야,어짜든가 마음 편히 먹으라우야/너는 그토록 공부하고 싶어 야단하지 않았냐/돈일랑 걱정 말고 공부하라우/이 에민 괜찮으니 염렬랑 말구"'('조선족' 부분)'"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주머니 속의 여자가 외친다//좋은 조건의 대출 상품이 있다고/동창 모임이 있다고/심지어는 벗은 여자 사진이 있다고/시도 때도 없이 외쳐댄다'('주머니 속의 여자' 부분)

스쳐가는 일상의 단면에서 짚어낸 인생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성찰도 날카롭다. '조심할 것/흉보기 쉽고/소리나기 쉽고/싸우기 쉽고/갈라서기 쉽고//숨어 있던 마성(魔性)도/들뜨는 날이니'('명절' 전문)

'장모님은 여든네 살/큰언니는 여든아홉/어느 날 장모님이 큰언니의 전화를 받고 계셨다/핸드폰 사용법에 대한 설명 같았다/"언니,그건 말이야…"//치매에 걸렸다고 처제가 병원에 모시고 다니고 있는/우리 장모님'('자매' 전문)

시인은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와 환경파괴,중동의 살상과 혁명 등을 바라보면서 현대 물질문명 속의 우리 삶과 자연,종교에도 지긋한 시선을 들이댄다.

'우면산에 올 때는/그냥 오게나/요란한 등산복 차림도 필요 없으니/(중략) 삶이 밋밋해지거든/우면산에 오게나/행여 내가 없더라도/우면산에 올라/커피 대신 솔바람이나 마시고 가게'('우면산' 부분)

그는 "재난과 재앙을 넘어 인간을 위로하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것이 예술"이라며 "시의 기능도 우리 삶에 보내는 위로가 아닐까 싶어 마음이 따뜻해진다"고 말했다.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와 1972년 '시조문학'을 통해 등단한 그는 한국방송기자클럽 회장 등을 지냈으며 정지용문학상,유심작품상,편운문학상,한국문학상 등을 받았다.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