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내 균열·안이한 대응이 혼란 자초
IMF "경제상황 양호…시장이 문제"
재정감축안 의회 조기 승인 여부가 열쇠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3위의 경제국인 이탈리아가 그리스와 포르투갈에 이어 재정위기의 다음 희생자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이탈리아 정부가 파장 확산을 막기 위해 재정감축안의 조기 승인을 서두르고 있다.

지난 11일부터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로존 재무장관 회의에 참석했던 줄리오 트레몬티 이탈리아 경제장관은 그리스 채무 위기가 이오니아해를 건너 이탈리아 반도로 건너올 조짐을 보이자 12일 아침 예정보다 일찍 로마로 복귀했다.

실제로 전날 이탈리아 밀라노 증시의 FTSE Mib 지수는 3.96% 하락한 18,295로 거래를 마감했다.

또 12일 오전 10년 만기물 국채 이자율이 6.0%까지 상승해 유로존 채권시장의 기준점 역할을 하는 독일 국채(분트)와의 스프레드(수익률 차이)가 350 베이시스포인트(1bp=0.01%)에 달하는 등 금융시장의 동요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트레몬티 장관은 브뤼셀을 떠나면서 기자들에게 "이탈리아 통합 (재정) 패키지를 마무리하기 위해 떠난다"고 말했다.

이탈리아는 채무가 국내총생산(GDP)의 약 120%로 세계 최대 채무국 가운데 하나.

하지만 현재 이탈리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투기자본의 공세 등 시장이 조장하고 있는 것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지난 11일 미국 워싱턴에서 취임 후 첫 기자간담회를 열어 그리스, 포르투갈을 강타한 재정위기가 이탈리아로 전이될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 "근본적으로 시장이 주도한 것"이라며 의미를 축소했다.

라가르드 총재는 "IMF는 최근 이탈리아의 경제상황을 점검했는데 상당수 경제통계 수치가 매우 양호했다"고 덧붙였다.

프랑코 프라티니 이탈리아 외무장관도 이날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와의 인터뷰에서 자국의 위기는 "순수하게 투기적인 것"이라며 이탈리아 경제는 기본적으로 매우 양호하다고 강조했다.

프라티니 외무장관은 "우리 은행들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 아주 잘 운영되고 있다"며 "이탈리아에는 스페인의 자산 버블이나 아일랜드의 금융 버블, 그리스의 공공재정 위기가 같은 것들이 없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금융시장의 동요가 진정한 위기로 이어지지 않도록 차단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정부가 마련한 재정감축안이 신속하게 의회의 승인을 받는 것이라 데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이탈리아 정부의 재정감축안은 재정적자를 2010년 말 현재 4.6%에서 2014년까지 0.2%로 낮춰 균형재정을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와 관련,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지난 11일 "이탈리아 정부가 유로존 안정을 위해 필요한 일을 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면서 "재정감축안을 승인함으로써 시장에 중요한 신호를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트레몬티 이탈리아 경제장관도 같은 날 이탈리아 채권이 투기자본의 표적이 되고 있다면서 "우리는 시장에 강력한 신호를 보낼 것이며, 재정감축안은 일주일 안에 승인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실 이탈리아 금융시장의 혼란은 경제 문제를 정치와 직접 결부시킨 정부의 안이한 대응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최근 지방선거 및 원전부활 국민투표에서 참패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재정 감축안 처리를 늦출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됐고, 총리 소유의 기업에 막대한 특혜를 부여하는 내용의 수정조항이 재정 감축안에 슬그머니 포함됐다가 여론의 비판에 밀려 삭제되는 소동도 있었다.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재정 감축안 처리 시기를 놓고 마찰을 빚었던 트레몬티 경제장관에 대해 지난 8일 보도된 신문 인터뷰에서 "팀 플레이를 하지 않고 시장하고만 대화한다"며 "트레몬티는 스스로 천재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바보 취급한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국제사회로부터 널리 인정받는 경제전문가인 트레몬티에 대한 시장의 신뢰는 그동안 유로존 재정위기에 이탈리아가 말려들지 않도록 지켜주는 중요한 버팀목이었지만,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공개 비난은 대들보를 흔드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이같은 발언이 전해진 뒤 시장의 동요가 심각해지자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곧바로 성명을 내고 트레몬티의 금융 정책을 지지한다며 말을 바꿨지만, 이미 밀라노 증시는 폭락한 다음이었다.

(제네바연합뉴스) 맹찬형 특파원 mangel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