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조선 등 주요 제조업에서 일본 기업의 경쟁력이 한국에 뒤처진 가장 큰 원인은 기업가정신이 쇠퇴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

일본 경영학계의 대표적 한국통으로 꼽히는 야나기마치 이사오 게이오대 경영학 교수(50)는 지난 2일 연세대 새천년관 국제회의실에서 기자와 인터뷰를 갖고 "과거 10여년간 일본 산업계에 '경영자'는 있었지만 '기업가'는 없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한국 기업들도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기업가정신의 퇴조를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야나기마치 교수는 이날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과 아시아기업연구회가 주최하고 한국경제신문이 후원한 '한 · 일 산업경쟁력 비교 심포지엄'에서 '일본 기업의 톱매니지먼트와 의사결정'이란 주제발표를 했다.

그는 1990년대 이후 한국과 일본의 D램 경쟁력이 엇갈린 것은 일본의 '샐러리맨 사장'과 한국의 오너경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야나기마치 교수는 "임기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일본의 전문 경영인들은 이 같은 D램 업종을 제대로 쫓아갈 수 없었다"며 "그러나 오너가 책임을 지고 과감하고 신속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진 삼성전자가 결국 일본 업체를 따라잡았다"고 평가했다.

그는 일본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나이가 많았던 점도 기업가정신을 약화시킨 배경이라고 지적했다. 2002년 기준 일본 상장기업 사장의 절반이 60대를 넘었으며 대기업의 경우 평균 연령이 64세였다. "연령이 높은 CEO들은 임기를 무사히 채우고 은퇴하기를 바라는 경향이 높다"는 게 야나기마치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그 결과 1980~1990년대 이후 일본 재계에서 리스크를 지고 과감한 투자를 하거나 창조적 활동을 통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업가,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대기업들이 일본을 따라잡을 정도로 빠르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은 멀리 내다보고 과감한 투자를 단행할 수 있는 의사결정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강력한 오너십과 전문경영인이 조화를 이룬 지배구조가 이를 가능하게 했다"고 설명했다.

야나기마치 교수는 일본에서도 다행히 기업가정신을 발휘하는 전문 경영인이 하나둘 나타나고 있다며 대표적인 예로 사카모토 유키오 엘피다 사장을 소개했다.

1999년 NEC와 히타치의 D램 사업부가 뭉쳐 출범한 엘피다는 수년간 적자에 허덕였지만 사카모토 사장의 강력한 리더십에 의해 지금은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반도체를 위협할 정도로 D램 업계의 '작은 강자'로 부상했다.

사카모토 사장은 취임 직후 모회사(NEC와 히타치)에 간섭하지 않도록 요구한 뒤 마치 오너처럼 경영 전권을 행사했다. 인텔로부터 자금을 유치하고 대만 기업과의 연합을 구성해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야나기마치 교수는 "엘피다의 부상은 샐러리맨답지 않은 사카모토 사장의 기업가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덧붙였다.

야나기마치 교수는 '한국 경제사와 이병철 회장의 기업가 활동'이라는 박사 학위 논문을 썼으며 이를 위해 1998~2000년 연세대에서 2년간 공부했다.

장진모 기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