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엔 처음입니다. 모든 게 낯설고 신기해요. 이 집에도 누군가 오래 살았겠죠.잘 보존한 것 같군요. 정원도 예쁘고,특히 팔각형의 별채가 인상적입니다. 이게 바로 한국적인 아름다움인가 봐요. "

서울 필동 한국의집에서 만난 아르헨티나 여성 작가 아나 마리아 슈아(Ana Maria Shuaㆍ60).지난 24~26일 열린 서울국제문학포럼 참가차 방한한 그는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문인이다. 이번 포럼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르 클레지오와 가오싱젠 등 세계적인 거장 13명,국내 문인 33명과 함께 '세계화 속의 삶과 글쓰기'에 관해 토론했다.

"한국 작가 두세 명의 책이 아르헨티나에 번역됐지만 읽어볼 기회는 없었어요. 한류 열풍도 아직 제대로 접해보지 못했습니다. 20여년 전부터 한국인들이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꽤 많이 왔어요. 여기 와서 보니까 이렇게 아름다운데 왜 그들이 이민을 왔나 싶어요(웃음)."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시에 소질을 보였다. 16세에 첫 시집 '태양과 나'로 아르헨티나예술국가기금상과 아르헨티나작가회의 명예상을 받아 주변을 놀라게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대에서 문학을 공부한 뒤 1976년 아르헨티나에 군사정권이 들어선 뒤 남편과 함께 파리로 가 스페인 잡지 '캄비오 16'의 특파원으로 일했다. 이때부터 소설 등 산문으로 영역을 넓혔다.

로사다출판사 국제소설상을 받은 첫 소설 《인내심 있는 여자》와 아르헨티나로 복귀해 발표한 두 번째 소설 《라우리타의 사랑》은 영화화됐다. 이때 시나리오 작가로 데뷔했고 이후 동화,에세이 등 80여권의 작품을 발표했다. 국내에는 《아마존에 가기는 너무 어려워》(좋은엄마),《공포 공장》(바움),《세상에서 나가는 문》(다림) 등이 번역돼 있다.

그는 원고지 7장 이내의 짧은 분량에 무한한 상상력을 불어넣는 미니픽션(마이크로픽션 · 초단편소설)의 대표 작가이기도 하다. 《꿈꾸는 여인》 《게이샤의 집》 《혼돈의 화원》 《환영의 시대》 등 4권의 미니픽션집이 유명하다. 그의 미니픽션은 주로 25행 안팎의 문장에 하나의 스토리를 담아내고 때로는 2,3행으로 응축하기도 한다.

"미니픽션은 20세기에 탄생해 중남미 지역에서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발전해왔습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훌리오 코르타사르 등 유명 작가들이 이 장르의 소설을 썼죠.후안 호세 아레올라와 아우구스토 몬테로소라 등 멕시코 작가들도 쓰기 시작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동화나 스토리텔링을 잘 하는 분들이 긴 얘기 중간에 미니픽션을 넣기도 했어요. 스페인어권에서 많이 발전하긴 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읽는 것은 아닙니다. 상징과 은유가 많아서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시를 쓴 덕분에 미니픽션을 더 잘 쓸 수 있었다"며 "이런 작품은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해서도 읽기 편하기 때문에 앞으로 계속 인기를 끌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특기는 아이러니와 유머다. 젊은 나이에 파리로 간 것도 남들이 얘기하는 독재정치 때문이 아니라 결혼하고 새로운 인생을 낭만적인 곳에서 시작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침 파리에 친구들이 있어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자 했죠.1년간 머물렀는데 부에노스아이레스가 그리웠어요. 파리에는 맛있는 프랑스 요리가 많지만 맛있는 피자나 햇볕은 별로 없잖아요. "

그때의 경험처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시대의 아이러니도 마찬가지라고 그는 말했다. 인터넷에 익숙하기 때문에 모두가 짧은 얘기만 좋아할 것이라는 건 오산이라는 얘기다.

"장편소설은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 더 선호해요. 한 군데 읽다가 멈추고 다음에 또 시작해도 그 얘기가 연결되잖아요. 짧은 단편은 한 문장 한 문장이 다른 세계니까 읽는 사람이 더 많이 집중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

그는 문학의 위기에 대해서는 공감하지만 옛날에 비하면 지금이 가장 좋은 상황이라고 낙관했다. "책의 죽음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문학적으로 가장 좋은 시대에 살고 있어요. 특권층이 아니라 대중이 문학을 읽을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죠.인터넷과 정보기술(IT)에 의해 문학의 시대가 죽어간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역설적으로 최고의 정점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해요. 100년 전 문학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글을 못 읽는 이들이었잖아요. "

어릴 때부터 책에 파묻혀 지내는 바람에 '도서관의 생쥐'라는 별명을 얻었다는 그는 이번 서울국제문학포럼의 주제인 '문학의 세계화'와 관련,편중된 세계화의 그늘을 지적했다.

"아직은 '북미 중심의 세계화'에 그쳐 안타까워요. 중심 국가 이외의 나라들이 소외된 게 문제죠.아르헨티나가 경제 부문에서 신자유주의의 파고를 심하게 겪었는데 문화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제 책이 여러 나라로 나가지만 주로 영어로 번역되고 있고,대만에서도 영어 중역본이 나온다고 해요. 저 역시 아프리카나 필리핀 문학에 대해서는 접한 적이 없습니다. "

남미의 정치 · 경제적 변화가 작가와 사회의 정서를 독특하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남미에는 이민자들이 많아요. 아르헨티나에도 스페인 등 유럽에서 많이 오죠.이들이 원어민들과 섞여 여러 문화를 만들어내요. 이렇게 혼합되고 입체화된 얘기들이 외국으로 나갈 때 사람들의 관심을 더 끌 수 있는데 이게 가장 큰 장점이지요. "

전자책에 대해서는 낙관적이었다. "최근 몇몇 스페인어권 출판사와 전자책 출간을 포함한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전자책을 무서워하는데 전 두렵지 않아요. 전자책이 부피를 많이 차지하지 않으니까 종이책을 대체할 텐데 앞으로 상당 기간은 두 매체가 공존할 겁니다. 마치 TV와 연극 라디오 영화가 함께 살아남은 것이나 지폐와 신용카드가 함께 살아남은 것처럼 말이죠.다만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이 걱정입니다. 문학은 파피루스 종이에 쓰여지든 전자책에 담기든 형식보다 콘텐츠가 중요하니까요. "

그의 집필 주제는 인간의 자유와 외압에 대한 저항 의지다. 처음에는 원하는 주제를 모두 쓸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글을 쓰면서 구체적인 주제가 반복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예를 들어 의학에 관한 것이나 질병,인간의 몸,의사와 환자의 관계 등이 그렇더군요. 병원이나 여름캠프,감옥 등 닫혀진 공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관심이 많아요. 늘 그렇듯 문학은 쓸모가 없는 듯하면서도 필수적인 것입니다. 문학이 예술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죠.우리가 독재자의 말은 듣지 않지만 문학의 말은 듣잖아요. 인간의 삶이란 반짝 타올랐다가 영원의 안갯속으로 소멸하는 작은 불꽃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상기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게 문학이지요. "

만난사람 = 고두현 문화부장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