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년 전 일이다. 당시 필자는 뉴욕 파크애비뉴의 60층 팬암빌딩에 있는 로펌의 변호사였다. 하버드대와 예일대 출신 등 쟁쟁한 미국인 변호사들과 함께 일했다. 미국 변호사 경험은 필자가 한국에서 판사직을 포기하고 미국에 유학을 했기에 가능했다. 인생의 궤도 수정이었다. 미국 풀브라이트 재단은 초임 판사였던 내게 유학을 원한다면 장학금을 주겠다며 판사를 그만둬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결단을 내렸다. 새로운 세계를 향해 도전해보기로 했다.

당시 몇 명 되지 않는 예일대 로스쿨의 낯선 동양인 유학생이 됐다. 증권법 분야에 도전한 최초의 한국인 로스쿨생이기도 했다. 로스쿨을 졸업하고 앞길이 막연할 무렵 뉴욕의 대형 로펌에서 채용 제의가 들어왔다. 30대 초반의 후진국 젊은이를 변호사로 쓰겠다는 건 당시 미국 법률시장에선 파격이었다. 필자가 잘나서가 아니었다. 한국의 기업이 그 무렵 미국으로 진출하는 상황과 맞아떨어져 한국인 변호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같은 팀의 유대인 변호사 조지가 한국의 대기업 한 곳이 캘리포니아의 광산개발 계약을 하려고 하는데 참여하지 않겠느냐고 의견을 물어왔다. 나는 그날 밤 잠을 못 자고 흥분했다. 한국인 변호사인 내가 할 일이었던 것이다. 조지는 내게 그동안의 진행 경과와 쟁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고 다음 회의에 참석하라고 했다. 나는 한국 기업의 대리인으로서 미국 측과 계약을 체결하는 변호사 역할을 맡았다. 한국 기업이 의사결정을 할 때 실수하지 않도록 '면책조항'을 알려주고 조심시켜야 했다. 수많은 전문 법률용어의 지뢰밭을 한국의 기업인들이 무사히 지나도록 세심한 안내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기업인이 사업에 관한 의사결정을 할 때 그에 따른 위험을 사전에 알려주는 게 미국 변호사 윤리의 첫째 포인트였다. 예정된 회의 직전 조지가 난감한 표정이었다.

"한국 기업에서 당신을 변호사로 쓰지 않겠다고 알려왔어.담당임원의 말이 자기들이 외국 생활을 많이 해서 영어를 잘 하는데 한국인이 왜 필요하냐는 거야." 순간 나는 찬물을 뒤집어쓴 느낌이었다. 결국 나는 그 프로젝트에서 배제되고 말았다. 얼마 후 조지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내게 물었다. "한국 기업 임원들과 회의를 해보면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도 다시 묻지를 않아.부끄러워하는 거야.내가 '알아들었냐'고 재차 확인해도 고개를 그냥 끄덕이는 거야.분명 모르는 것 같은데도 말이야…."

미국에선 다시 묻는 게 절대 창피한 일이 아니다. 특히 중요한 국제거래에서 실수는 돌이킬 수 없는 큰 손실로 이어지곤 한다. 결국 계약은 성립되지 않았고 한국 기업은 로펌에 30만달러라는 거액의 자문료만 내고 물러갔다. 다양한 분야에서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이 늘고 있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그건 흉이 아니다. 공자가 제자인 자로에게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是知也)'라고 하지 않았는가.

신영무 < 대한변호사협회장 ymshin@shink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