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
당시 몇 명 되지 않는 예일대 로스쿨의 낯선 동양인 유학생이 됐다. 증권법 분야에 도전한 최초의 한국인 로스쿨생이기도 했다. 로스쿨을 졸업하고 앞길이 막연할 무렵 뉴욕의 대형 로펌에서 채용 제의가 들어왔다. 30대 초반의 후진국 젊은이를 변호사로 쓰겠다는 건 당시 미국 법률시장에선 파격이었다. 필자가 잘나서가 아니었다. 한국의 기업이 그 무렵 미국으로 진출하는 상황과 맞아떨어져 한국인 변호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같은 팀의 유대인 변호사 조지가 한국의 대기업 한 곳이 캘리포니아의 광산개발 계약을 하려고 하는데 참여하지 않겠느냐고 의견을 물어왔다. 나는 그날 밤 잠을 못 자고 흥분했다. 한국인 변호사인 내가 할 일이었던 것이다. 조지는 내게 그동안의 진행 경과와 쟁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고 다음 회의에 참석하라고 했다. 나는 한국 기업의 대리인으로서 미국 측과 계약을 체결하는 변호사 역할을 맡았다. 한국 기업이 의사결정을 할 때 실수하지 않도록 '면책조항'을 알려주고 조심시켜야 했다. 수많은 전문 법률용어의 지뢰밭을 한국의 기업인들이 무사히 지나도록 세심한 안내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기업인이 사업에 관한 의사결정을 할 때 그에 따른 위험을 사전에 알려주는 게 미국 변호사 윤리의 첫째 포인트였다. 예정된 회의 직전 조지가 난감한 표정이었다.
"한국 기업에서 당신을 변호사로 쓰지 않겠다고 알려왔어.담당임원의 말이 자기들이 외국 생활을 많이 해서 영어를 잘 하는데 한국인이 왜 필요하냐는 거야." 순간 나는 찬물을 뒤집어쓴 느낌이었다. 결국 나는 그 프로젝트에서 배제되고 말았다. 얼마 후 조지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내게 물었다. "한국 기업 임원들과 회의를 해보면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도 다시 묻지를 않아.부끄러워하는 거야.내가 '알아들었냐'고 재차 확인해도 고개를 그냥 끄덕이는 거야.분명 모르는 것 같은데도 말이야…."
미국에선 다시 묻는 게 절대 창피한 일이 아니다. 특히 중요한 국제거래에서 실수는 돌이킬 수 없는 큰 손실로 이어지곤 한다. 결국 계약은 성립되지 않았고 한국 기업은 로펌에 30만달러라는 거액의 자문료만 내고 물러갔다. 다양한 분야에서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이 늘고 있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그건 흉이 아니다. 공자가 제자인 자로에게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是知也)'라고 하지 않았는가.
신영무 < 대한변호사협회장 ymshin@shinkim.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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