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화창했던 지난 13일 전북 부안의 고사포 해변.형형색색의 날렵한 선체를 지닌 수십 대의 시 카약(sea kayak)들이 출항 준비에 한창이다. 카약의 주인들은 한국투어링카약클럽(http;//cafe.daum.net/KTKC · 회장 이경우) 회원들.이들은 고사포 야영장에 베이스캠프를 마련,주변의 풍광 좋은 섬들을 카약으로 찾아다니고 있는데 지인의 소개로 카약 투어에 합류했다.

2006년 설립된 KTKC 회원들은 주말마다 각자의 카약을 가져와 강이나 계곡,바닷가에 모여 급류타기,해상 투어 등을 즐긴다. 이날 목적지는 고사포 해안에서 멀리 보이는 하섬.각자의 카약에는 시트 앞뒤로 50ℓ 이상의 공간이 있는데 여기에 야영을 위한 텐트,매트리스,버너,부식 등을 싣고 출항한다.

이 클럽 회원들 중 자칭 '카약폐인'들은 올 들어 특별한 도전에 나섰다. 카약으로 전국의 해안을 탐사하기로 한 것이다. 지난 3월 인천 앞바다를 출발해 일기와 바다 상황에 따라 하루 수십㎞씩 해안을 따라 남하 중이다. 물론 직장이 있기 때문에 주말에만 모여 2~3일씩 이동한다. 넉넉잡아 올 연말까지 남해안과 제주도를 돌아 동해안의 강원도 북부 지역까지 주파할 계획.해상 카약은 예상치 못한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어서 최소 3인 이상이 팀을 이뤄 움직이는 것이 안전수칙의 하나다.

장비 점검을 마친 이들이 드디어 미끄러지듯 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가이드를 자청한 이경우 회장의 카약에 동승해 고사포 해안에서 마주 보이는 하섬으로 향했다. 카약에 익숙하지 않은 필자 때문에 처음에는 약간 기우뚱하는가 싶더니 이내 익숙한 패들링으로 안정을 찾고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파도를 가르기 시작한다.

적잖은 두려움과 긴장감 속에 출발했지만 어느덧 익숙해지자 마치 다큐멘터리나 영화에서처럼 그 옛날 알래스카 원주민이 사냥에 나간 듯한 착각이 일기 시작한다. 카약의 기원은 그린란드의 에스키모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이 바다에서 사냥할 때 주로 썼던 가죽 배가 알래스카 에스키모한테 전해졌다. 모터보트가 카약을 대체한 이후 에스키모들은 카약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대신 레저의 한 장르로 도입돼 전 세계의 마니아들을 낳았다.

패들링 소리 외에는 고요한 바다를 헤치며 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여와 이름 모를 작은 섬을 여럿 지났다.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인 하섬에 도착한다. 슈트를 벗으니 온 몸이 땀에 흥건히 젖었다. 운동량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하다. 하나둘 도착한 일행들은 어둡기 전에 서둘러 텐트를 치며 사이트를 구축한다. 각자 제 몸 하나 간신히 구겨 넣을 작은 텐트를 하나씩 치고 격한 패들링으로 꽤나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식사를 준비한다. 찬은 적어도 여기서 먹는 음식은 꿀맛이라는 말로는 결코 다 담아낼 수가 없다.

해안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소박한 음식을 나누고 큼지막한 해도를 보며 다음 행선지의 루트에 관해 얘기를 나누는 동안 우정은 푸른 바다만큼이나 깊어간다. 전날까지 황사로 뿌옇던 하늘이 이날은 유난히 선명한 낙조에 물들어 온통 선홍색 붉은 기운이 장관을 연출한다. 김용택 시인은 고사포 앞바다의 낙조를 이렇게 노래했던가. '변산 반도를 다 돌아다니다가/고사포 앞 바다 하얀 모래밭으로 달려와서/소리도 없이 잦아지는 파도야/수평선 끝에서 지금 떨어지는/붉은 저것이 시방/네 몸이냐/내 몸이냐/선운사의 동백꽃이다냐.'

왁자지껄했던 카약커들도 경외스러운 노을빛에 넋을 잃은 채 수평선에 반쯤 걸려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느라 말문을 닫았다. 하지만 그토록 크고 경외롭던 노을도 잠시뿐.찰나지간에 바닷속으로 꽁꽁 숨어 버리고 만다. 수평선이 삼켜버린 태양을 보며 아쉬운 탄성을 질렀지만 잠시 후 또 하나의 멋진 장면이 펼쳐진다. 일몰빛을 시기라도 했던 것일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들이 아직 푸른 여운이 남은 밤하늘에 흩뿌려지기 시작한다. 별들이 수놓는 하늘을 지붕 삼고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하루를 마감한다.

카약의 짜릿한 흥분이 얼른 가시지 않아서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한다. 요즘에는 카약을 즐기는 인구가 점차 늘면서 가족이나 연인들끼리도 함께 즐긴다고 한다. 사랑과 우정은 무엇보다 상대에 대한 관심과 배려에서 시작되는 것 아닐까. 카약은 서로를 배려하고 집중할 수 있는 레저여서 더욱 매력적이다.

황훈 사진가

(Daum cafe '백패킹(backpacking)하는 사람들' 운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