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새벽.하이닉스반도체 특허그룹 사무실에 만세 소리가 울렸다. 11년간 지루하게 이어져온 미국 램버스와의 특허소송에서 하이닉스가 원심을 뒤집고 2심에서 승소했다는 판결문이 현지 고등법원 홈페이지에 올라온 것.실무를 도맡아온 민경현 하이닉스 특허그룹 수석은 "램버스와의 11년 전쟁에서 이겼다"며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이닉스는 이번 승소로 4억달러(약 4330억원)의 거금을 되찾게 됐다.

◆막다른 골목…끈질겼던 하이닉스

램버스와 악연이 시작된 건 2000년 8월이었다. 미국 반도체 설계회사인 램버스는 히타치를 시작으로 세계 반도체 회사들을 상대로 사상 최대의 특허소송을 냈다. D램 특허를 무단으로 사용했다는 주장이었다. 하이닉스는 곧바로 특허무효소송으로 선제 대응에 나섰다. 램버스가 독점적 지위를 악용해 업계 전반에 피해를 주려 한다(반독점법 위반)는 내용도 더했다. 램버스 소송 업체들이 많은 탓에 법정 공방은 길게 늘어졌다.

2005년 하이닉스에 희소식이 전해졌다. 독일 인피니언이 램버스 소송에서 이겼다는 것이었다. 램버스가 관련 자료를 불법으로 파기했다는 것이 승소의 주된 이유였다. 민 수석의 귀가 번쩍했다. "똑같은 소송이니까 우리에게도 기회가 있다"란 생각이 들었다.

그해 처음 공판에 들어가면서 하이닉스도 "램버스가 증거서류를 무단으로 파기했으니 특허주장은 무효"라는 논리를 펼치기 시작했다. 램버스처럼 반도체 특허료 수입으로 운영되는 회사는 언제든 거래선과의 소송을 염두에 두고 자료를 보관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램버스는 매년 특정 날짜를 정해 300상자분의 자료를 버렸다. 하이닉스는 램버스가 자신들에게 불리한 자료를 없애려 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삼성도 포기했던 램버스 소송

하이닉스 특허그룹 소속 전 직원 50명이 소송에 매달렸지만 희소식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하이닉스가 제소한 램버스의 반독점법 위반사건은 법원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업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 마이크론은 램버스에 승소를 했지만(2009년 2월) 똑같은 소송에서 하이닉스는 패소 선고(2009년 3월)를 받았다.

타격은 컸다. 캘리포니아주 연방지법은 램버스에 4억달러의 손해배상금과 경상 로열티를 주라는 1심 판결을 내렸다. 하이닉스 직원들은 크게 당황했다. 민 수석은 "똑같은 소송에서 타사는 승소하고 우리만 패소한 셈이 돼 실무자들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고 했다.

지난해 초 삼성전자가 램버스와 7억달러를 주고 특허계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들으며 또 한번 위기가 찾아왔다. 민 수석은 "램버스와 합의를 해볼까도 해봤지만 요구하는 금액이 합리적인 수준을 벗어나 있었다"며 "그야말로 막다른 골목이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합의에 실패한 하이닉스는 미국 현지 로펌인 OMM을 통해 소송에 매달렸다. 회사 관계자는 "램버스가 상고를 하더라도 미국 현행법상 연방 대법원 상고사건 가운데 5% 이하만 심리를 열기 때문에 사실상 최종판결과 다름없다"고 설명했다.

◆한국기업 잇달아 특허전쟁 승전보

삼성전자는 최근 비주얼 음성메일 특허를 보유한 클라우스너 테크놀러지로부터 특허 소송을 당했다. 무단으로 특허를 침해했다는 이유에서다. 삼성전자는 지난달에도 세계 스마트폰 시장의 강자로 꼽히는 애플로부터 디자인을 베꼈다는 이유로 특허소송을 당했다. 특허청에 따르면 2004년 이후 지금까지 국내외 기업 간 제기된 특허소송은 총 611건.2004년 41건에 불과하던 소송이 지난해엔 114건으로 배 이상 늘었다. 2004년 이후 제기된 소송 가운데 외국기업이 국내 기업을 대상으로 한 것이 460건으로 총 75.3%에 이른다.

국내업체들의 승소도 이어지고 있다. 삼성전기가 일본 무라타제작소와 맞붙은 MLCC(적층세라믹콘덴서) 분쟁에서 이겼고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SMD)는 미국 하니웰과 벌인 LCD(액정표시장치) 소송에서 승소했다.

김현예 기자 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