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제가 대지진의 후폭풍으로 밀려온 '엔고 쓰나미'로 또 한번 치명상을 입게 됐다. 글로벌 3대 경제대국이자 첨단 부품생산 기지인 일본의 경제 회복이 더뎌질 경우 아직은 취약한 글로벌 경제회복세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대지진 이후 상승 조짐을 보이던 엔화 가치는 지난 16일 한때 달러당 76엔대까지 뛰어 2차 대전 후 최고치를 경신했다. 엔고는 일본의 중핵 산업인 자동차 전자 철강 등의 수출에 악영향을 미친다.

시장에선 '일본 정부가 엔화 상승을 마냥 보고만 있진 않을 것'이라고 관측하면서 엔고가 오래가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대지진으로 일본 경제가 약화되면 엔화는 장기적으로 약세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단기적으론 엔화 강세가 약(弱) 달러로 나타나고,이것이 원자재 가격 상승을 부르면 연쇄적으로 글로벌 인플레이션 압력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주요 7개국(G7) 국가들이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긴급 회의를 갖고 대책을 논의한 것도 이런 우려 때문이다.

◆안전자산 회귀에 투기까지

최근 엔화 강세의 주된 배경은 투자가나 기업들의 안전자산 회귀 심리다. 대지진과 원전사고에 따른 불안으로 해외에 투자한 위험자산을 처분하고 일본으로 가져올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그 경우 달러 등 외화를 팔아 엔화로 바꿔야 한다. 시장에선 엔화 수요가 늘고 이게 엔화값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또 일본의 보험회사가 지진피해 보험금을 지급하기 위해 갖고 있는 달러 자산을 팔 것이란 예상도 마찬가지다. 이런 전망에 따라 고수익을 노리는 헤지펀드들이 투기적으로 엔화를 사재기하고 있다는 게 시장의 분석이다. 다카다 기이치 미즈호증권 이코노미스트는 "16일 뉴욕시장에서 엔화가 한때 달러당 76.25엔까지 급등한 것도 헤지펀드의 투기 탓"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엔고가 대지진으로 흔들리는 일본 기업을 더 휘청거리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엔화 가치가 달러당 1엔 오르면 도요타자동차의 영업이익은 연간 300억엔(4000억원),혼다는 170억엔,소니는 20억엔 줄어든다. 도요타는 그렇지 않아도 지진 여파로 일본 내 모든 공장의 가동을 22일까지 중단시켜 약 10만대의 생산차질이 불가피한 상태다. 일본 기업의 이익이 줄어 주가까지 추가 폭락하면 일본 경제는 대지진 재해로부터 재기하는 데 더 어려움을 겪게 된다.


◆日정부 '엔고 방치 않을 것'

시장의 관심은 엔화의 고공행진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이냐다. 사사키 도루 JP모건체이스 애널리스트는 "시장은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의 환율시장 개입을 경계하면서도 원전 폭발에 따른 불안심리가 강해져 엔화 강세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엔고가 장기 추세로 오래가기는 어렵다고 보는 전문가들이 더 많다. 일본 정부가 강력한 시장개입에 나설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야마모토 시로부미 바클레이즈은행 이코노미스트는 "일본 정부는 재난 극복을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할 것"이라며 "미국 등 국제사회도 일본 정부의 시장 개입을 용인할 것"이라고 말했다. 재정적자가 임계점에 달한 일본 정부로선 경기를 부양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기업들의 수출 확대를 위해 엔화 약세를 유도할 것이란 얘기다.

일본은행이 대지진 발생 이후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사상 초유의 대규모 엔화자금을 풀고 있는 것도 엔화 약세 요인이 될 예상이다. 일본은행은 지난 14일 21조8000억엔,15일 20조엔,16일 13조8000억엔 등 사흘간 총 55조6000억엔(750조원)을 시중에 공급했다. 일각에서는 원전 사태가 최악으로 치달아 일본 경제의 회생 가망이 없을 경우 엔화 투매 현상이 나타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그 경우 엔화가치는 폭락하게 된다.

도쿄=차병석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