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통일을 꿈꾸던 진나라 왕 '영정'은 암살을 막고자 2만명의 호위군사를 두고도 자신의 100보 앞엔 아무도 얼씬 못하게 하는 백보금지령을 내린다. '무명(이연걸)'은 영정이 겁내던 자객 셋을 어떻게 처치했는지 말할 때마다 접근을 허락받아 마침내 10보 앞까지 간다.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영웅' 속 황제를 비롯한 제왕의 방이나 집무실이 크고 긴 것은 이처럼 아무나 함부로 가까이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장치였다. 기업의 회장실을 세로로 길게 만드는 것 역시 임직원이나 방문자가 다가서는 동안 긴장하게 하는 방법이라고들 한다.

민선 구청장에게도 그런 보안과 위엄이 필요한 걸까. 서울 자치구 중 마포 · 성동 · 중 · 양천 · 동대문 · 강남 · 은평 · 강북구 구청장실 규모는 90㎡ 이상이고,가장 큰 관악구는 무려 112.18㎡(34평)나 된다는 소식이다. 실평수로 치면 41평 아파트 면적을 혼자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서울 시내 25개 구청의 지난해 평균 재정자립도는 50%가 채 안되는 49.3%다. 관악구(33.9%)는 물론 방 크기가 평균(60~80㎡) 보다 넓은 강북구(31.7%)와 은평구(33.8%) 모두 자립도로 치면 최하위권이다. 구청장실이 가장 작은 곳은 재정자립도 4위인 송파구(26.2㎡)로 관악구의 4분의 1이 채 안된다.

관악구의 경우 2007년 재정자립도는 28.3%로 당시 자립도 1위였던 강남구(90.5%)의 31%에 불과했다. 자치구 간 재정자립도 차이가 줄어든 건 서울시가 2008년 자치구 간 재정 불균형 완화를 위해 공동과세제를 도입한 덕이다.

살림은 어려운데 혼자 넓은 방을 쓰고 있는 건 무슨 까닭일까. 할 일은 많고 예산은 적으니 신경 쓸 일이 많아 건강을 위해 실내 달리기라도 해야 해서인가.

외관으로 폼을 잡으려 애쓰는 건 일부 구청장에 그치지 않는다. 지역 출신 교육감이 부임하면서 시 · 도 교육청 상당수가 관사를 매각하거나 교육 시설로 전용한다는 판에 탈권위와 개혁을 내세워온 곽노현 교육감이 이끄는 서울시 교육청에선 새로 관사를 짓겠다고 나섰다.

국내외 인사 초청 의전 행사 및 교육감과 부교육감에 대한 보안 강화가 필요하다는 이유다. 국회 역시 2212억9300만원을 들여 제2의원회관 신축 및 현 의원회관 리모델링을 한다는 마당이다. 다들 날계란 세례라도 받을까 두려운 건가. 실로 궁금하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