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라는 담론이 가지고 있는 기본 성격은 세상을 넓게 보는 것입니다. 그런 철학이 지역성에 국한되거나 편향된다면 진정한 철학의 역할을 하기 힘들다고 봅니다. 철학을 빙자한 지역학이 돼버리죠.특히 서구에 지나치게 편중된 철학사를 바로잡는 일은 진정한 의미의 세계화로 나아가기 위한 지적 · 정신적인 준비라고 생각합니다. "

철학 대중화에 앞장서온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52 · 사진)이 국내 철학자로는 처음으로 《세계철학사1》(길 펴냄)을 펴냈다. 지금까지 나온 철학사 책은 세계철학사가 아니라 서양 · 중국 · 한국 · 인도 등 특정 지역이나 언어권을 다룬 것이 대부분이다.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의 《세계철학사》나 소비에트과학아카데미철학연구소의 《세계철학사》조차도 비서구 지역의 철학 전통을 서구철학사의 전사(前史)쯤으로 치부했다.

이 원장은 "서구의 이런 편견은 근대성이 이룩한 성과에 도취돼 근대 이전으로 그걸 투사한 데서 유래한다"고 설명한다. 그 결과 오늘날 세계는 미국,영어,앵글로-색슨 중심의 헤게모니를 글로벌 스탠더드로 삼게 됐고 전 세계의 학문과 예술마저도 이 시스템에 철저히 복속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이런 식의 구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철학사를 쓰는 것은 철학 자체는 물론 미래를 위해 필수적이라는 얘기다.

"오늘날 세계화의 난맥상을 타개하려면 지식인들이 먼저 지역,국가,언어,전공 등의 편협한 울타리에서 벗어나 거시적인 비전을 만들어 나가야 해요. 철학은 그런 작업을 위한 개념적인 비전을 만드는 것인데,제가 생각하는 거시적 비전은 치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환경 파괴,양극화,국제적 갈등,문화의 상품화 등 인류사가 만들어낸 각종 질병들을 치유해 나가는 것이 21세기의 과제라고 봐요. 그런 치유를 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우리의 삶은 참담할 겁니다. "

이 원장의 《세계철학사》는 총3권으로 기획돼 있다. 이번에 나온 1권은 '지중해 세계의 철학'을 다뤘고,'아시아 세계의 철학'을 다룬 2권은 내년에,'근현대 세계의 철학'을 다룬 3권은 내후년에 펴낼 예정.철학이라는 행위가 주로 유라시아 대륙에서 진행됐고 근대 이전에는 동과 서의 철학 전통이 따로 전개됐다는 점에서 1,2권을 지중해 세계와 아시아 세계로 분리했지만 근대 이후에는 서로 교통하며 진행됐다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
이 원장은 2000년 최초의 대안철학학교인 철학아카데미를 설립,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철학 강좌를 마련해왔다. 또 철학과 다른 학문 간의 소통과 이해를 위한 이른바 '가로지르기'라는 개념을 주창하고 실천해왔다.

그는 "이 책은 제가 지금까지 실천해온 '가로지르기'에 대한 일종의 중간 정리에 해당된다"며 "철학아카데미 설립 때부터 세계철학사 집필을 구상,준비해왔다"고 말했다. 최근 학계에서 확산되고 있는 통섭의 흐름에 대해선 다소 비판적인 견해를 내놨다.

"통섭이 면적인 개념이라면 가로지르기는 선적인 개념입니다. 통섭의 개념은 듣기에는 거창하지만 너무 막연한 이상이며,면 전체를 덮으려 하기보다는 특정한 선을 따라가면서 구체적으로 작업할 필요가 있어요. 아직 선들이 제대로 만들어지고 있지도 않은데 너무 일찍 면 전체를 덮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자칫 허풍이 될 수 있습니다. "

'철학하는' 국민이 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를 묻자 "무엇보다 철학자들의 노력이 필요하다"며 "전문적인 연구와 논문도 필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대중에게 다가서는 저술 작업을 부지런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대중이 철학화돼야지 철학이 대중화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