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서울시장 시절 초대 정무부시장을 지내다 퇴임을 앞둔 무렵이었다. 나는 그동안 함께 일하며 고생한 서울시청 직원들에게 마음의 선물을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서울시 직원이 본청에만 1만5000여명이 넘는 게 아닌가. 고민 끝에 평소 즐겨 부르던 노래를 음반이나 파일로 만들어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학창시절 보컬그룹의 멤버로 활동했던 나는 현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후배들과 함께 음반작업을 시작했다. 성급하게 만들다 보니 많이 어설프긴 했지만 '정두언과 함께 하는 팝송여행'이라는 다소 촌스러운 제목의 음반은 이렇게 세상에 나왔다. 시험 삼아 시중에 내놓게 된 나의 첫 번째 음반은 의외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래서 대형서점의 베스트앨범 목록에 5주째 오르기도 했다. 가수협회에서 가수증을 보내왔고 연예인협회로부터 가수 부문 특별공로상도 받았다.

이 당시 나는 슬픈 일을 겪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동기라는 다섯 살짜리 아이가 있었는데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수술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는 동네 산악회를 중심으로 일일찻집을 열어 돈을 만들었다. 그러나 아이는 그 사이를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너무 슬퍼 많이 울었다. 그때 그 아이의 아빠가 "우리 동기 같은 아이를 많이 도와주세요"라고 내게 부탁했다. 그래서 우리는 음반 및 공연 수익금을 'Save the Children'을 통해 심장병을 앓고 있는 어린이들을 위해 쓰기로 했다.

그 이후 나는 좀 더 좋은 음반을 만들겠다는 욕심에서 무리를 거듭한 끝에 4집 앨범까지 내놓을 수 있었다. 젊은 그룹 클릭B와 국회에서 조인트 콘서트를 열고 뮤직비디오도 발표했다. 그러나 국회의원 가수를 보는 대중의 시선은 결코 너그럽지만은 않았다. 4집 앨범만큼은 반드시 성공시키고 싶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제작사와 함께 노력한 결과,가수들에게는 꿈의 무대인 TV 음악회에도 나가게 됐다. 이제 뭐 좀 되겠구나 싶었는데 방송사 노조에서 곧바로 성명이 나왔다. 왜 정치인을 방송에서 띄워주느냐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아직도 히트곡이 하나도 없는 '무명 중견가수'다. 나로서는 참 억울했지만 이게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우리나라에서 국회의원과 가수는 양립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내가 아무리 노래를 잘 불러도 국회의원이지 가수가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이런저런 축하 행사에 가면 종종 축사 대신 내 노래 '희망'을 축가로 부른다. 이따금 국회의원이 너무 가벼운 게 아니냐는 지적도 받지만 이 땅의 재미없고 딱딱한 정치문화를 조금이라도 바꾸어 보겠다는 욕심에서 애써 스스로가 광대임을 자임한다. 국회의원 가수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그날까지.

정두언 한나라당 국회의원 dooun4u@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