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미국에서는 최초로 흑인정권이 탄생했다. 55년간 일본을 집권한 자민당이 힘없이 무너진 것은 2009년이었다. 한국은 2010년 세계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서울에서 개최하며 국제사회의 주류로 부상했다. 브릭스(BRICs)로 대변되는 브라질 인도 등 신흥개발국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다. 이들이 기존 정치질서 붕괴의 전주곡이었다면,슈퍼파워 중국의 등장은 신(新)냉전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결정판이었다. 앞으로 10년은 국제정치 주도권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 간 패권다툼의 장(場)이 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2012년은 선거의 해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 프랑스 등 강국들의 권력 향배가 결정된다. 미국 러시아 프랑스 정상들은 국내 정치에 올인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다. 지상목표는 선거 승리다. 표를 의식한 국수주의와 포퓰리즘(대중 인기영합주의)이 득세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국내 표를 겨냥한 보호무역주의와 환율전쟁,영토분쟁,자원전쟁 등 국지적 갈등이 동시다발로 발생할 개연성이 다분하다. 그만큼 국제정치의 불확실성은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앞으로 10년은 '힘의 정치' 시대

새로운 10년의 화두(話頭)는 힘의 정치다. 경제도 외교도 힘의 논리에 좌우될 것이다. 중심에는 미국과 중국이 자리하고 있다. 당장 힘의 외교가 표면화되고 있다.

한국의 위상을 높여준 지난해 11월 G20 정상회의의 서울 개최 결정 과정은 미국의 힘을 그대로 보여줬다. 서울 개최는 우리 정부의 작품이 아니었다. 자국의 이해를 100% 반영한 미국의 작품이었다. 프랑스가 개최를 강력히 희망했지만 미국과의 껄끄러운 관계로 일찌감치 배제됐다. 경쟁관계인 중국은 아예 대상에 오르지 못했다. 막판 일본이 변수였다. 한국보다 더 가까운 일본이 경쟁자였지만 후텐마 미 공군기지 이전을 둘러싼 양국 갈등이 발목을 잡았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결국 한국을 낙점했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한 · 미 관계 복원에 심혈을 기울여온 터였다. 각국의 반발을 무마한 것도 미국이었다. 기획부터 최종 결정까지 모든 과정은 미국의 몫이었다. 한국 정부에는 말 그대로 행운이 넝쿨째 들어온 셈이었다.

미국의 배려에는 나름의 정치적 고려가 숨어 있었다. 국제정치에 공짜는 없다. 미국은 한국에 도움을 청할 게 몇 가지 있었다. 우선 한 · 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양보다. 미국 내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는 추가 양보가 절실했다. 또 아프가니스탄 등 해외 파병에 대한 동참도 필요했다. 결국 한 · 미 FTA 추가 협상에서 미국에 많은 양보를 한 것은 G20 서울 개최라는 선물에 대한 화답의 성격이 강했다.

중국은 더 노골적이다. 동중국해의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근처에서 일어난 중국 어선과 일본 순시선 충돌사건의 해결 과정은 중국이 힘의 정치에 나섰음을 대외에 공식화했다. 책임은 중국 어선에 있었다. 중국은 사실을 무시한 채 힘으로 밀어붙였다. 자국 국민의 반일(反日) 감정을 부추겼다. 일본이 버티자 희토류 수출 중단이라는 극단적인 카드를 꺼냈다. 일본은 하루 만에 백기를 들었다. 말 그대로 중국의 힘 앞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한 것이다.

서해에서 발생한 중국 어선의 침몰사건도 비슷하다. 중국 어선이 우리 해경의 순시선을 들이받은 사건이었지만,중국 측은 사과 한마디 없었다. 비공식 채널을 통해 우리 정부를 압박했다. 중국 어부들은 아무일 없다는 듯이 풀려났다. 중국과의 외교마찰을 우려한 우리 정부가 물러선 것이다.

앞으로 미국 중국을 중심으로 한 힘의 정치는 더 거세질 것이다. 한국의 당면 과제는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하느냐다. 한 · 미 관계는 지금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정상궤도에 올랐다. 중국이 문제다. 천안함 폭침사건과 연평도 사태 해법을 놓고 미국과 보조를 맞추다 보니 중국과 소원해진 게 우리 정부로선 엄청난 부담이다. 정치를 경제에 연계시키는 게 중국이라는 걸 감안하면 더 더욱 중국과의 외교관계 강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포퓰리즘에 흔들리는 민주주의

내년 총선과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한국은 포퓰리즘에 빠져들고 있다. 선거를 1년5개월여 앞두고 벌써부터 표를 의식한 선심성 정책이 난무한다. 오세훈 서울시장과 시의회가 정면 충돌한 무상급식이 대표적이다. 우파정당인 한나라당의 서민특위가 제시한 '전 국민 70% 복지'와 '은행 이익금의 10% 서민대출' 등도 포퓰리즘 정책이다. 한나라당은 대선 공약인 감세정책 철회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야당은 한술 더 뜬다. 무상급식에 이어 노인 틀니와 무상의료,나아가 부유세 신설 주장까지 나온다. 일단 표를 얻어 승리하고 보자는 승리지상주의적 발상이 정치권을 지배한다.

포퓰리즘 정책은 이성과는 거리가 멀지만 '서민 보호'나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을 통해 국민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하다. 실제 표로 연결되는 점에서 파괴력이 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행정수도 이전 공약은 대선 승패를 갈랐다. 여야 모두 경쟁적으로 매달리는 이유다. 포퓰리즘의 위험성은 "포퓰리즘이 한번 성공하고 나면 대중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포퓰리즘에 기댄 정치세력이 계속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명희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이다. 선거 때마다 포퓰리즘이 표로 연결되고,표를 얻기 위해 더 강한 포퓰리즘 정책을 내놓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면 국가가 거덜날 수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포퓰리즘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 세계적 현상이다. 정치인이 표의 유혹을 떨치기란 쉽지 않다. 중남미의 좌파 포퓰리즘이 맹위를 떨친 것도 이런 메커니즘이 작동한 결과다. 포퓰리즘의 노예가 된 남미 대부분의 나라는 실패했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브라질과 칠레다. 성공의 비결은 포퓰리즘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은 경제살리기로 좌우 이념대립을 잠재우며 87%의 경이로운 지지율 속에 퇴임했다. 미첼 바첼레트 전 칠레 대통령도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 구리 수출로 번 돈을 서민층에 써야 한다는 야당의 요구를 거부하고,국부(國富)펀드를 만들어 금융위기 충격을 이겨내 국민적 영웅이 됐다.

일본에서는 선거 때 공약한 포퓰리즘 정책으로 미국과의 관계에 금이 갔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는 표를 겨냥해 후텐마 공군기지 이전을 약속했다. 이 공약은 하토야마에게 승리를 안겨줬다. 기쁨은 잠시였다. 미국의 강력한 반발과 현지 주민들의 공약 이행 요구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 지지율이 급락했다. 결국 8개월 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일본은 복지 포퓰리즘의 덫에 걸려 이미 재정이 거덜난 상태다.

케빈 러드 전 호주 총리도 총선을 앞두고 내건 포퓰리즘 정책의 희생양이 됐다. 호주 광산기업들에 40%의 세금을 부과해 국민 복지에 쓰겠다는 자원세 정책을 내놓았다가 재계는 물론 여론까지 등을 돌려 결국 낙마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얼마 전 무상급식 법안에 서명했다. 재선을 향해 뛰는 오바마 대통령이 선거가 다가올수록 대외적인 포퓰리즘 행보에 나설 개연성이 다분하다. 보호무역주의 성향이 짙어지고 각국을 향한 통상압력이 거세질 수 있다. 중국을 향한 위안화 절상 압박도 지속될 것이다. 대(對)테러전쟁도 미국의 중요한 관심사다. 오바마가 포퓰리즘에 빠진다면 국지적 갈등 요소가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다.

이재창 정치부장 leej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