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유럽끼리 경쟁 부추기고 활용"

유럽 지도자들은 자신이 세계적인 정치인이라는 것처럼 포장하기 위해 미국, 또는 미국 대통령과 친분을 보여주는 데 목말라하고 있으며, 이 덕분에 미국이 유럽 지도자들의 경쟁과 갈등을 손쉽게 조장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고 독일 시사 주간지 슈피겔이 12일 분석했다.

슈피겔은 2007년 11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의 텍사스 크로퍼드 목장에 초대받으면서 자신이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인이라는 것을 과시할 기회를 얻었다면서 그러나 미국은 메르켈 총리의 이런 기대를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했다고 밝혔다.

슈피겔은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국 외교전문을 인용해 독일 주재 미국 대사관은 메르켈의 크로퍼드 목장 방문 전 "메르켈이 더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니콜라 사르코지(프랑스 대통령)와 국제무대에서 관심을 놓고 경쟁을 벌이고 있다"면서 따라서 아프가니스탄 파병 확대와 같은 주요 이슈들과 관련해 방문의 대가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본국에 보고했다고 전했다.

유럽이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으로서 지위를 유지하는 데 큰 관심을 보일수록 미국은 유럽 지도자들이 서로 경쟁하도록 장난을 치는 것이 너무 쉬워졌고 미국 외교정책 책임자들은 이런 그들을 더는 중요한 상대가 아니라 '정치적 난쟁이'로 간주했다고 슈피겔은 평가했다.

슈피겔은 사르코지 대통령이 이런 것에 특별히 취약한 것으로 간주됐다면서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관은 2007년 그의 첫 미국 공식 방문에 앞서 "프랑스 새 대통령은 '미국인 사르코지'로 불리는 인물로 대선 승리 성명에서 프랑스 외에 유일하게 미국을 언급했다"고 보고했다.

또 다른 전문에 따르면 2008년 7월 당시 미국 대선 후보였던 오바마가 파리를 방문했을 때 사르코지는 오바마와 공동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일정을 긴급히 조정하기도 했다.

고든 브라운 전 영국 총리가 취임한 직후 영국 주재 미국 대사관이 보낸 전문도 비슷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전문은 새 총리가 토니 블레어 전 총리처럼 '부시의 푸들'로 보이는 것을 싫어했지만 그 역시 "미국과의 강력한 유대를 원하고 있고, 영국에 이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밝혔다.

슈피겔은 "모든 사람이 미국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원하고 있고 그 결과 미국이 유럽 지도자들을 깔보게 된 것 같다"면서 "이에 따라 오바마도 유럽인들의 기대를 무시하거나 유럽 지도자들을 상대로 장난을 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지난 5월에는 유럽연합(EU) 의장국이었던 스페인의 호세 루이스 사파테로 총리가 미국-EU 정상회의에 오바마 대통령을 초청했다.

현지 미국 대사관은 "스페인 정부는 국내 정치적 이유로 미국-EU 정상회의를 간절히 원하고 있고 사파테로는 오바마 대통령의 불참을 중대한 실패로 간주하고 있다"면서 오바마의 참석을 대가로 스페인에 아프간, 이란, 관타나모와 관련해 구체적 지원을 요구하는 등 오바마 방문에 대한 스페인의 열망을 미국의 이익에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국에 알렸다.

실제로 사파테로 총리는 재임 1기 때 아프간에 병력을 추가 파병했고 5명의 관타나모 수감자를 데려오기로 합의했으나 이것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정상회의 직전 유럽 지도자들이 오바마와의 만찬 때 자리 배치 문제로 다투고 있을 때 오바마는 갑작스럽게 바쁜 일정을 이유로 참석을 취소했다.

유럽의 재정위기 때 유럽이 통일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자 `유럽에는 지도자가 없다'는 미국의 믿음은 더 강해졌다.

미국은 유럽에 통화할만한 전화번호가 없다는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의 불평이 그 어느 때보다 유효한 것으로 보고 있다.

외교 전문에 따르면 미국은 메르켈 총리에 대해 "그녀는 강하지만 그것은 대체로 그녀의 상대들이 너무 약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사르코지에 대해서는 "어디든 빠지지 않으려는 성향과 지나친 활동성 때문에 노출 과다의 위험이 있다"면서 측근에게도 매우 강압적이어서 `그가 옷을 충분히 입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얘기해주려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또 데이비드 카메론 영국 총리는 "정치적으로 소심하고 내용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베를린연합뉴스) 김경석 특파원 kskim@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