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박과 혈압이 빨라진다. 근육이 수축되면서 머리가 쭈뼛쭈뼛 서는 것 같다. 숨은 가빠지고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한다. '

100m 스타트라인에서 출발 준비를 하고 있는 육상 선수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증상이지만 우리가 모멸감을 느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누구나 겪지만 경험하기 싫은 순간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저 불쾌하고 짜증 나는 일쯤으로 여기고 다시는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세계적인 최고경영자(CEO)로 아이폰의 주역인 스티브 잡스도 본인이 설립한 회사에서 해고 통지를 받는 아픔을 겪었다. 애플 창립자로서 하루아침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게 됐을 때 그는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고 한다. 심지어 언론들까지 '사기꾼'이라고 조롱했다.

스티브 잡스는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해고 이듬해 바로 루커스필름으로 달려가 컴퓨터그래픽 부문을 사들여 지금의 '픽사(Pixar)'를 설립하는 의욕까지 보여줬다. 이후 픽사의 경영위기가 계속 다가왔지만 그때마다 '영원히 남을 무언가를 만들어내겠다'며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해고된 지 10년이 지나 잡스는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라는 대박작품을 만들어내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이는 다시 애플사 CEO를 꿰차는 계기가 됐다.

잡스는 해고 당시를 회고하면서 "누가 내 배를 후려쳐 기절한 기분이었다. 매우 쓴 약이었지만 `내게는 정말로 필요한 약이었다. 돌이켜 보면 해고당할 당시가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전하기도 했다.

사실 이런 사례는 우리 기업사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전쟁 후 불모지나 다름없던 산업 여건에서 오직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남의 상품을 베껴 팔거나 반제품을 수입해 단순 조립하는 것밖에 없었다. 수출역군을 외치며 비행기에 오른 기업인들은 해외 바이어들에게 '한국 제품은 싸구려'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그러나 모멸감에 좌절하는 기업인은 없었다. 되레 중국 월나라 구천이 패전의 굴욕을 되새겼던 것처럼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자세로 품질혁신 의지를 다졌다. 또 이들의 도전 의지는 한국 기업 특유의 기업가 정신으로 거듭나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자동차,선박을 만드는 기업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물론 모멸감을 성공의 원동력으로 만든 도전의 60년 기업사 덕분에 우리는 단숨에 선진국 문턱까지 올 수 있었다.

길을 걷다보면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듯이 우리 인생에도 여러 굴곡이 있게 마련이다. 때로는 모멸감이라는 별로 반갑지 않은 친구와도 마주치게 된다. 애써 외면하려고만 하지 말고 지름길로 안내하는 좋은 친구로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자신의 상황을 냉철하게 둘러보고 부족한 점을 발견하면 그것이 바로 성공의 첫 주춧돌을 쌓는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동근 < 대한상의 상근부회장 dglee@korcham.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