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대기업 사정 수사에 속도를 내기 시작한 가운데 대상 기업들의 이름이 나돌면서 재계에는 무거운 침묵과 긴장이 흐르고 있다. "검찰의 다음 목표는 A그룹" "지금까지의 수사는 맛보기에 불과했다" 등 확인되지 않은 소문까지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다.

기업들은 청와대와 검찰을 비롯한 사정당국의 기류와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사정의 속도와 방향을 조율할 컨트롤타워가 없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면서 더욱 불안해 하고 있다. 전례를 찾기 힘들 만큼 검찰과 국세청,공정거래위원회가 경쟁적으로 조사에 나서는 형국이어서 사정의 칼날이 어디까지 미칠지 가늠키 어렵다고 토로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일부 기업에서는 경쟁 기업의 약점을 고의적으로 흘리는 '이전투구' 양상마저 빚어지고 있다"며 씁쓸해 했다.

◆"사정한파 다시 부나" 초긴장

익명을 요구한 한 기업 임원은 "검찰 수사 방향과 범위가 심상치 않은 것은 분명하다"며 "문제가 있는 기업을 조사하는 것은 법치주의 확립 차원에서도 당연하지만 '아니면 말고' 식 수사로 흐를 경우 해당 기업은 물론 국가경제 전반에 큰 후유증을 남길 수 있다"고 말했다.

다른 대기업 관계자는 "대기업들을 상대로 한 본격 사정이 시작된 것인지,그렇다면 대상이 어디까지 확대될 것인지 모든 것이 불확실해 기업들을 더욱 움츠러들게 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이런 가운데 기획재정부 공정위 국세청 등 정부 고위 관계자들은 잇달아 차명계좌와 탈세,불공정행위에 대한 강력 대응방침을 밝히며 기업들을 압박하고 있다. 윤증현 재정부 장관은 지난 20일 국감에서 "어떤 형태의 차명계좌도 반드시 근절돼야 한다"고 말했고,이현동 국세청장은 "대기업과 오너 대주주의 탈세에 대해 강력히 대응할 방침"이라고 언급했다.

기업들은 원론적인 발언들이긴 하지만 검찰이 사정수사의 강도를 높이고 있는 것과 맞물려 예사롭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다.

김준규 검찰총장도 18일 법사위의 국정감사에서 "비자금에 관심있다. 1년 동안 예비군 체제로 운영되던 중앙수사부가 최근 수사 체제에 들어갔고 수사는 시점 문제"라며 강도 높은 기업 수사를 예고했다.

기업들은 한꺼번에 정부의 모든 '힘 있는' 기관들이 나서 압박해 들어오고 있는 듯한 분위기에 당혹해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 후반기의 화두로 제시한 '공정사회' 기조와 맞물려 대기업과 정치권에 대한 사정 수위가 높아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13일 대기업 총수들과의 간담회에서 "공정사회가 곧 사정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지만 이 발언 이후 한 달여 만에 사정한파가 불어닥치고 있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확산되는 불안감

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 전무는 "전 세계 이목이 쏠리는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를 목전에 둔 시점에 한국 브랜드 가치에 흠집을 주는 기업 수사확대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기업들은 내년 경영계획을 수립하고 사업 전략을 확정해야 할 시점에 불어닥치고 있는 사정바람 탓에 제대로 일할 수 없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경영전략 확정을 위해 글로벌 시장 동향을 파악하고 분석해야 할 기획실 인력 대부분이 개인적 인맥까지 동원해 검찰 등 사정당국의 움직임 파악에 몰두하고 있다"며 "이런 소모적인 일이 왜 지금 벌어지고 있는지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현석 대한상공회의소 전무는 "국제 원자재값 상승과 원화 강세 등으로 경제가 불안한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기업 수사가 장기간 이어지고 수사 대상기업이 확대될 경우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재계 관계자는 "상생에 이어 이번에는 '공정'이란 잣대로 경영권 승계,차명계좌 등 각 기업들의 과거사 재검증이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며 "그동안 글로벌 시장에서 쌓아온 국내 기업들의 명성과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정호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