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사회의 그림은 김영삼 정부가 먼저 그렸다. 취임사는 이렇게 썼다. "우리 사회에는 그늘 속에 살아온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은 위로받아야 합니다. 많이 가진 사람은 더 많이 양보해야 합니다. 힘 있는 사람은 큰 것을 양보해야 합니다. "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다짐했지만 '구두선'에 그치고 말았다.

'공정사회'는 집권 후반기 이명박 정부의 '정책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8 · 15 경축사는 공정사회를 3가지로 압축하고 있다. 공정한 사회는 '출발과 과정'에서 공평한 기회를 주지만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지는 사회이며,공정한 사회에서는 승자가 독식하지 않아야 하며,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친서민 정책은 공정한 사회를 위한 구체적 실천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공정사회는 국정운영의 방향타로서 기능할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아 보인다.

시장경제에서 분배는 당사자 간의 '계약'을 통해 이뤄진다. 당사자가 분배 결과를 수용하는 것은 '자유의지'에 의해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이때 제기되는 의문은 당사자 간에 협상력의 차이가 존재한다면 자유의지로 계약했다는 이유만으로 분배의 결과에 정당성이 확보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협상력을 결정하는 요인 중 '우연'과 '선천적 자질' 등은 통제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협상력을 같게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제도적 요인 등이 특정 주체에 '유 ·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공정'의 요체다. 불편부당을 통해 공정성이 확보된다면 협상력의 차이는 부차적이다. 계약이 '자율적'으로 이뤄지고 계약에 따른 이익이 당사자 간에 굳이 반분(半分)되지 않더라도 '상호 호혜적'이면 계약은 도덕적으로 정당하며 분배의 결과 또한 공정하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논리를 수용하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을 위해 정부가 개입할 여지는 줄어든다. 정부의 개입은 중소기업의 경쟁력에 기초한 협상력 제고를 오히려 저해시킬 수도 있다. 그리고 정치권력과 달리 시장에서 '승자독식'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승자의 몫을 골고루 나누는 것이 공정한 것도 아니다.

또한 공정은 불편부당이 그 본질이기 때문에,친서민정책과 공정사회는 양립가능하지 않다. 친기업도 마찬가지다. 친시장만이 공정원칙과 양립가능하다. 친서민 정책은 '온정적 사회'에 더 부합된다.

시장은 비인격적 자원배분 기구이기 때문에 시장을 통한 분배는 상대적으로 공정하다. 문제는 시장을 통하지 않은,즉 '비시장적 배급'(rationing)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파워 그룹은 철의 삼각형에 비견되는 '관료조직과 정치권 그리고 사법부'다. 이들의 특권과 특혜 그리고 반칙이 규율되지 않으면 공정사회는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

중앙부처 공무원의 산하기관으로의 낙하산 인사는 관료조직의 '자기증식' 기제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최근 7년간 외교부의 특채 규모는 외무고시 선발인원의 4.4배에 이른다고 한다. 국회는 한번이라도 의원 배지를 달면 매달 120만원의 연금을 평생 받는 법안을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 전관예우 관행과 스폰서 검사라는 일그러진 초상은 무전유죄(無錢有罪)의 자괴를 낳게 한다. 공정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이들의 자기 팔을 자르는 아픔이 있어야 한다.

공정사회는 마땅히 지향해야 할 가치이다. 하지만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상생이 공정의 본질이 아니다. 공정의 본질은 '비시장적 배급'을 규율하는 것이다. 파워 그룹의 특권의식이 사라질 때 비로소 공정사회가 정착된다. 그리고 친서민 정책에 '온정적 사회'라는 정명(正名)을 붙여줘야 한다.

조동근 < 명지대 경제학 교수·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