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에 한국어 열풍…"시험 붙어 한국 가야죠"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한국어능력시험'에 4만명 응시
한국서 한 달만 일해도 1년 연봉…네팔 각지서 시험보러 '원정'
카트만두 시내 여관 빈방 없어
한국서 한 달만 일해도 1년 연봉…네팔 각지서 시험보러 '원정'
카트만두 시내 여관 빈방 없어
"시험 잘봐라,꼭 붙어야 돼." "응 알았어 누나,걱정마."
29일 오후 2시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 시내에 위치한 노벨 아카데미.한국어능력시험(EPS-TOPIK)을 치르기 위해 교실로 들어가는 남동생 록 머니 아디카리(19)의 손을 누나 두루가 구마리 어디가리(33)가 꼭 잡으며 포옹했다. 노벨 아카데미는 이날 한국어 시험을 치른 28개 고사장 중 가장 많은 1200명이 모여든 곳이다. 록은 "2008년 누나가 시험을 봤는데 떨어졌다"며 "이번엔 내가 꼭 붙어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 가족들을 부양하고 싶다"고 말했다. 동생을 들여보낸 누나는 시험을 치르는 1시간10분 내내 교실 밖에서 두 손 모아 기도했다.
네팔에 한국어 바람이 불고 있다. 2008년에 이어 두 번째인 이번 한국어능력시험에 무려 4만2056명이 몰려들었다. 카트만두 시내 여관방은 시험이 치러진 28일과 29일 이틀간 빈방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먼마야 판데씨(32)는 4개월 전 네팔 북부 굴미지방에서 출발해 이틀에 걸쳐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그는 11남매 중 장녀로 3남매의 어머니였다. 판데씨는"꿈이 있어 도전하는 것"이라고 한국말로 또박또박 말했다. 그는 "비록 아이들과 떨어져 있지만 한국에서 돈을 모아 온가족이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고향에 짓고 싶다"고 했다. 카트만두 박다툼에 사는 러메스 부다토키씨(25)는 "네팔에선 취업이 힘들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가져 본 적이 없다"며 "한국에서 돈을 많이 벌어 6남매와 부모님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시험을 친 4만여명 중 합격의 영광을 맛볼 수 있는 수험생은 4000명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네팔인들이 한국어 공부에 열중하는 것은 '돈을 벌어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코리안 드림 때문이다. 네팔 근로자들의 연평균 소득은 1000달러 수준으로 매우 낮다. 한국에선 외국인 근로자의 한 달치 월급이다. '한국행=대박'이라는 공식이 네팔에 생긴 이유다. 네팔인들은 사우디아라비아,두바이,이스라엘,말레이시아 등으로도 일하러 가지만 월 임금이 30만~40만원에 불과할 정도로 열악하다.
응시자가 4만명을 웃돌면서 한국어 시험 자체가 엄중한 관리 아래 치러지는 국가적 행사가 됐다. 이번 시험을 위해 한국산업인력공단 직원 88명이 현지에 파견됐다. 이외에 교민 100여명과 현지인 1600명의 별도의 도움을 받아 시험을 치렀다.
주(駐)네팔 한국 대사관과 현지 경찰에도 이틀간 비상이 걸렸다. 1주일 전 외교행랑을 통해 도착한 시험지를 사방이 막힌 방에 보관한 뒤 철통보안을 유지했다. 문제지가 유출되면 한국의 수능시험 재출제와 같은 대혼란이 불가피하다. 이날 오전 8시30분 대사관에 회색 밴 28대가 들어와 시험지를 싣고 떠날 때마다 경찰 호송차가 따라 붙은 것도 이 때문이다. 경찰은 도로를 지날 때마다 교통통제를 해줬다.
시험장 부정 행위도 엄격하게 적발해 낸다. 김종효 한국산업인력공단 자격관리이사는 "시험지를 기존의 A,B형 두 가지에서 이번에는 네 가지로 늘려 주위 사람들이 모두 문제 순서가 다른 문제지를 받게 했다"며 "부정행위를 고발하면 10달러를 준다는 포상금 제도까지 공시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돈을 벌어온 네팔인들은 성공한 사람들로 통했다. 카트만두 남쪽 바이라와 지방에 사는 곰비르 구룽씨(43)는 대학에서 정치학과 역사학을 공부하고 중학교에서 2년 동안 역사를 가르치다 1991년부터 1999년까지 8년 동안 한국에서 일했다. 그는 5만달러를 벌어 네팔에 집도 사고 사립학교인 '퓨처 라이트 영어학교'(Future Light English School)를 설립해 운영 중이다. 자신처럼 한국에서 돈을 벌어와 성공한 사업가 500명을 모아 '네팔 한국 개발 위원회'를 만들었다. 구룽씨는 "네팔 근로자 300만여명이 해외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국내에 기업이 없어 일자리 구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라며 "앞으로 뜻이 맞는 이들과 함께 건설회사를 차려 일자리 창출에 앞장서고 싶다"고 말했다. 모한 그리스나 사푸코타 네팔 노동교통부 해외취업국장은 "네팔인들이 한국에 가면 돈뿐만 아니라 선진기술도 보고 배울 수 있다"며 "앞으로 한국 정부와 기업이 네팔에 기술학교를 설립해 고급 인력을 키워 한국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카트만두(네팔)=최진석 기자 isk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