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4대 황제 강희제는 61년간 여러 치적을 쌓은 명군으로 꼽히지만 말년에 후계문제로 골치를 썩었다. 35명이나 되는 아들들 간의 권력다툼 탓이었다. 정실 소생 둘째를 황태자로 책봉했다가 거둬들인 뒤 임종할 때 신하의 손바닥에 '사(四)'라고 써서 넷째 윤진(옹정제)을 지명했다. 그러나 옹정제 즉위 초 유언이 조작됐다는 얘기가 돌았다. 원래 14번째 아들을 총애해 '십사(十四)'를 적어 줬지만 신하가 '十'자를 혀로 핥아 지워 버렸다거나,한 획을 더해 '4황자에게(于四)'라고 바꿔버렸다는 소문이다.

온갖 시달림을 당한 옹정제는 훗날 후계자 이름을 비단상자에 넣어 숨겨놓고 자신의 사후 개봉할 것을 명했다. 청대의 독특한 후계지명 원칙이 된 태자밀건(太子密建)법의 시초다. 이는 골육상쟁과 신하들의 줄서기를 막는 데 도움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후계 다툼도 만만치 않았다. 8명의 아들들이 유혈 암투를 벌인 끝에 다섯째 방원이 형 정종을 밀어내고 태종이 됐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도 장자가 아닌 셋째였다. 조선의 적장자(嫡長者) 후계 관행은 조카 단종을 내친 세조 이후 정착됐다. 아무리 왕조시대이고 피붙이 자식이라도 권력을 넘겨주기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이 '인류사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로 꼽은 로마의 '오현제(五賢帝)시대'엔 당대의 가장 현명한 사람을 양자로 들였다 후계자로 삼았다. 하지만 오현제의 마지막 아우렐리우스가 아들 콤모두스에게 자리를 물려주면서 세습이 시작됐다. 세습 황제 대다수가 함량미달이었던 탓에 권위가 떨어지고 로마도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돌연한 방중 목적에 3남 정은의 후계 지명도 포함된 모양이다. 정은의 나이가 어리고 별다른 '공적'이 없는 터여서 고민이 이만저만 아닐 게다. 내부 권력구도를 웬만큼 정리한다 해도 굶주림에 시달리는 주민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미지수다. '남한 괴뢰패당' 운운하는 북한이 후계와 관련해 중국 눈치를 보는 것도 아이러니다.

무리한 후계 지명이 분란을 낳는다는 건 역사의 교훈이다. 북한이 아무리 통제사회라 해도 요즘 같은 세상에 3대 세습을 이루기가 순탄치 않을 게 뻔하다. 가뜩이나 남북관계가 경색돼 있는 마당에 한반도 정세가 더욱 불안정해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